진수 삼국지 주유전

 

주유(周瑜)는 자가 공근(公瑾)이며, 여강(廬江)군 서(舒)현 사람이다. 당조부(從祖父) 주경(周景)과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나라 태위(太尉)를 지냈다. 부친 주이(周異)는 낙양현의 령(洛陽令)을 지냈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 주경(周景)의 자는 중향(仲嚮)이다. 여려서 염능(廉能)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문에 능하여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어(察) 삼공의 부(公府:관공서)에 초대(辟)되었다. 후에 예주(豫州)자사가 되었을 때, 여남(汝南) 사람 진번(陳蕃)을 불러 별가(別駕)로 해, 영천(潁川)의 이응(李膺), 순곤(荀緄), 두밀(杜密), 폐국(沛國) 사람 주우(朱寓)를 종사(從事)로 삼았는데, 이들은 모두 천하 뛰어난 선비들이었다. 점차 승진해 상서령(尚書令)에 이르렀고, 마침내 태위(太尉)의 지위에 올랐다.


장번(張璠)의 한기(漢紀): 주경(周景)의 아버지는 주영(周榮) 이라고 하여, 장제(章帝), 화제(和帝)의 상서령(尚書令)이 되었다. 처음에 주경은 목이나·태수의 지위를 역임해, 선행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가까이해, 매년 효렴을 추천 할 때, (그 사람들을) 불러와 안방에 오르게 해 가족과 함께 연회를 즐겼다. 그러한 일은 3, 4회나 있고, 전별 금품을 보내기도 해서, 한층 더 그 사람의 자제를 임용해 주었고, 이렇게 말했다,


「移臣作子,於政何有?」
「신하를 옮겨서 자식으로 삼는다면 정치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단사편구라 의미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는데 생각건대 만약 신하를 자식처럼 여기고 천하의 정무를 한 집안의 가사처럼 생각해 치우치지 않은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 이전, 사도(司徒) 한연(韓縯)이 하내(河內)태수 였을 무렵, 공무에 있음에 사사롭지 아니함에, 천거함에 있어서 한마디 말만 해 줄 뿐 이니, 후에 그 집안(문호門戶)에는 (혜택을) 미치지 않았다. 말하려면, 


「나는 좋은 인물을 추천 했던 것이지, 일가를 이루는 혜택은 아니지 않는가.」


당시의 논자에게는 양쪽 모두를 비난 하는 사람이 있었다.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빼어났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그는 집을 서(舒)현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나이가 같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이 남달랐다. 주유는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그의 모친에게 배례했으며,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하며 돕고 살았다. 주유의 당부(從父) 주상(周尚)이 단양태수(丹楊太守)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동쪽으로 건너가려고 역양에 이르러 주유에게 급히 편지를 써서 알리니,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를 얻었으니, 순조로울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횡강(橫江)과 당리(當利)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너 말릉(秣陵)을 공격하고, 착융(笮融)과 설례(薛禮)를 격파시켰으며, 방향을 돌려 호숙(湖孰)과 강승(江乘)을 공격하고 곡아(曲阿)로 진입하자 유요(劉繇)는 달아났으며, 손책의 병사는 수만 명이 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주유에게 말했다.

 
『나는 이 병력이면 오(吳)군과 회계(會)군을 취하고 산월(山越)을 평정하기에 충분하오. 경(卿)은 돌아가 단양을 지키시오.』

 
주유는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원술이 주상을 대신할 태수로 사촌 동생(從弟) 원윤(袁胤)을 보냈으므로,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壽春)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 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는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거소(居巢)현의 장이 되기를 구하여서 길을 빌려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원술은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주유는 거소에서 오로 돌아왔다. 이 해가 건안 3년(198년)이다. 손책은 직접 주유를 영접하고,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將)을 수여하고 즉시 병사 2천과 기마 50필을 주었다.


江表傳曰:策又給瑜鼓吹,為治館舍,贈賜莫與為比。策令曰:「周公瑾英雋異才,與孤有總角之好,骨肉之分。如前在丹楊,發眾及船糧以濟大事,論德酬功,此未足以報者也。」

강표전에 이르길 : 손책은 또한 주유에게 악대를 주고 관사를 꾸며 줬으며 상으로 내린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할 수 없었다. 손책이 명령을 내려 말하길 : 「주공근은 영준하고 빼어난 재능이 있으며 총각시절부터 나와 더불어 친분을 맺어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다. 일전에 단양에서 무리와 배, 식량을 발하여 큰일을 이루어낸 것 같은 경우는 논공행상을 통했다고 해서 충분히 보답한 것이 아니다.」


주유는 당시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周郎)이라고 불렀다.

 
주유의 은덕과 신의는 여강(廬江)에서 빛났다. 손책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우저(牛渚)를 지키도록 하고, 후에 춘곡현의 장을 겸임(領春穀長)토록 했다. 오래지 않아, 손책이 형주를 취하려고 할때, 주유를 중호군(中護軍)으로 임명하고 강하태수를 겸임(領江夏太守)하도록 했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皖)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손책이 주유에게 태연하게 장난을 걸며 말했다.


"교공의 두 딸은 정처없이 떠도는 형편이지만(流離) 우리 2명을 남편으로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또 주유는 심양(尋陽)으로 진격하여 유훈(劉勳)을 격파시켰으며, 강하(江夏)를 토벌하고 예장(豫章)과 여릉(廬陵)을 평정하고 돌아와 파구(巴丘)에 남아서 지켰다.


신송지가 살피니 손책은 이때 처음으로 예장과 여릉을 얻었으나, 아직 강하는 평정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주유가 군대를 주둔시킨 파구는 현재의 파구현(巴丘縣;강서성의 峽江[협강])에 있어야 되며, 후에 그가 죽은 파구(호남성의 岳陽[악양])와는 다른 곳이다.
 
건안 5년(200년), 손책이 죽자, 그의 동생 손권이 일을 맡았다.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상하러 갔다가 오에 머물러 중호군(中護軍)으로써 장사(長史) 장소와 함께 모든 일을 관장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조조(曹操)는 원소(袁紹)를 쳐부순 후 북방을 통일하고 점차 그 세력을 키워 갔다. 건안칠년(202년), 조조는 오나라 손권에게 서신을 보내 임자(任子; 이천석 이상의 관직의 사람이 동복형제나 아들을 추천해서 중앙직으로 보내는 것.)할 것을 질책하였다.

 

손권은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문무백관들을 소집하였다. 장소(張昭), 진송(秦松) 등 여러 사람들은, 미적거리며 결정을 못했다. 손권은 아들을 보내지 않고 장수 주유를 홀로 들어오게 하여 어머니(오부인) 앞에서 논의하여 정하게 하였다.


“예전에 초나라가 처음 책봉되었을 때 100리의 땅도 안 되었습니다. 후계자가 현명하고 유능하여 영토를 넓히고 경계지역을 개척해 마침내 형(荊)과 양(楊)으로부터 남해(南海)까지의 지역을 점거대업을 전하여 복을 이어가기를 90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장군은 아버지와 형님이 남겨준 밑천을 이어받아 6개 군의 무리를 아우르게 되어 군사는 날카롭고 양식은 많으며, 장수와 병사는 명령에 복종하고 있고 산에서 동(鑄)을 주조하고 바다를 끓여서 소금을 만들어 경계 지역 안에서는 부유하고 풍요로우니 민심이 안정되어 사람들은 난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여 배를 타고 나가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돌아올 수 있으니, 우리들의 군대는 강하고 용맹하여 가는 곳마다 적이 없을 것인데 무슨 핍박이 있어서 인질을 보내려 하십니까?


인질이 한 번 들어가면 조씨와는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면 곧 부르는 명령에 가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하면 즉 남에게 통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대접받는다 하여도 일개 후(侯)의 인(印)을 주고 종복 10여 명과 수레는 몇 승 그리고 말은 몇 필에 불과한데 어찌 더불어 남면(南面)해서 고(孤)를 칭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니 서서히 그 변화를 관찰하십시오. 만약 조씨가 의에 따라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다면 장군은 그때 그를 섬겨도 늦지 않습니다. 만약 폭난(暴亂)을 일으키려고 도모한다면 군사는 불과 같아서 병사를 거두지 않으면 장수가 스스로를 불태울테니, 장군께서는 용맹을 감추고 위엄을 겨뤄 천명을 시다리시면 어찌 인질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권의 어머니(오부인)가


"공근(公瑾)의 말이 옳다. 공근은 백부(伯符)와 같은 나이로 한 달이 적을 뿐이다. 나는 그를 아들과 같이 볼 터이니 너는 그를 형으로 섬겨라"


이에 인질을 보내지 않았다.


건안 11년(206년), 그는 손유(孫瑜) 등을 인솔하여 마(麻)둔과 보(保)둔 두 주둔지를 토벌하고, 그곳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으며, 1만여 명을 생포해 군사를 돌려 궁정(官亭)을 지켰다. 강하태수 황조(黃祖)가 부장 등룡(鄧龍)을 보내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시상(柴桑)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유는 추격하여 토벌했으며, 등룡을 생포해 오군으로 보냈다.

 
건안 13년(208년) 봄, 손권이 강하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前部大督)으로 임명했다. 



이 해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항복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장군에게 유리한 형세로 대항할 수 있습니다. 유표는 수군을 훈련시켰고 몽충(蒙衝)이나 투함(鬬艦)이 수천 대 인데, 조조가 이것을 모두 포획하여 장강가에 늘어놓고 아울러 보병도 움직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내려온다면, 이때는 장강이 위험하게 되고, 이미 우리와 공동으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쌍방의 세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또 논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주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 장군은 신명스런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갖고 있고, 겸하여 아버지와 형의 위세에 기대어 강동을 할거하고 수천 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병사는 정예이고 식량은 풍족하며 영웅들은 공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응당 천하를 횡행하며 한왕조를 위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직접 사지로 보내져왔는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을 위해 헤아려보기를 요청합니다. 지금 북방의 영토를 이미 안정시켰고 조조에게 내부의 근심이 없어 시일을 늘려 오랫동안 전쟁터로 와서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와 수면 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지금 북쪽 땅은 평안치 못하고, 게다가 마초와 한수가 오히려 동관 서쪽에 있으면서 조조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을 버리고 수군이 기대어 오나 월과 다투는 것은 본래 중원에서는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현재는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 것이 없고, 중원의 병사들에게 멀리 강호의 땅을 건너도록 하였으므로 물과 땅에 익숙치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용병의 근심거리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함부러 행동했습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잡으려고 하신다면, 족히 오늘이 마땅합니다. 저는 정예병 3만 명을 받아서 하구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을 위해 조조를 무찌를 것을 확신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사악한 적이 한왕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려고 한 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명, 여포, 유표와 나만을 꺼려했을 뿐이요.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강표전: 손권은 칼을 뽑아 앞에 놓은 책상을 때려 부수며 말했다.


"여러분 중에서 다시 조조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오."


그리고는 회견이 끝났다. 이날밤 주유가 배알을 요구해 말했다. 주유가 뵙기를 청하고 말하길:


"모든 사람들이 조조의 서신(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인데, 회의할 때 보여주자 오나라의 모든 신하들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을 보고서 수군과 보병 80만이라는 말에 벌벌 떨고 있지만, 그 허실을 다시 헤아릴 필요도 없는 것으로, 이것에 대해 다시 회의를 여는 것은 더욱 무익한 일입니다. 지금 저들의 실제 (병력수를) 살펴보면, 중국(중원)인들은 불과 15- 16만명인데, 이 또한 군사들이 이미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지쳤으며, 유표의 군대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7-8만명 뿐이고 이들은 또한 의심을 품어 조조군에 완전히 편입된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병든 병사와 의심하는 병사들은 비록 군사가 많다고 하더라도 두려워 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정병 5만명을 주시면 제압할 수 있으니, 장군께선 근심하지 마십시오."


손권은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공근, 경이 그렇게 말을 해주니 고(孤)의 맘이 풀어지는구려.  자포(子布: 장소張昭)와 문표(文表; 진송秦松) 등등의 여러 사람들은 각각 자기 처와 아들딸를 돌아보는 등 사사로운 것만 생각하여 고를 크게 실망시켰소. 오직 경과 자경(子敬노숙)만이 고에게 찬동 해주니 이것은 하늘이 경들 두 명을 보내 고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오. 5만의 군세를 갑자기 모으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미 3만명을 선발해 놓았고, 함선·식량·무기 등은 모두 갖추어지고 있소. 경은 자경과 정공(程公정보)과 함께 먼저 출발하시오. 고는 곧 뒤따라 군대를 출발시켜 다량의 물자·식량을 싣고가 경을 후원하도록 하겠소. 경은 조조군을 잘 다룰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시오.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 곧 바로 귀환해 고에게 달려와 주시오. 그때는 마땅히 고가 맹덕(孟德;조조)과 결판을 낼 것이오"


신송지가 보건데 조조에게 대항할 방침을 세운 것은 사실상 노숙이었다. 당시 주유는 파양으로 파견되었었는데, 노숙이 주유를 불러서 손권에게 권하도록 했다. 주유가 파양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노숙과 은밀히 생각을 합쳤기 때문에 함께 공훈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전(주유전), 손권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묻자, 사람들의 의견을 제지시키고, 혼자만 거절할 계책을 말했다고 했다. 이것은 노숙보다 앞서 도모한 것이 아니므로, 노숙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當陽)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夏口)에 주둔하고는 제갈량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토록 했다. 손권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 군대는 적벽(赤壁)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南岸)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이때 황개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저 황개는 손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며, 언제나 장수를 맡았고, 받은 예우는 얇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천하가 이루어질 때에는 큰 형세가 있어야만 하고, 강동은 육군과 산월 사람들로 중국(중원)의 백만 병력을 감당한다는 것이 중과부적임은 천하가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오)의 부장들도 어리석든 어질든 간에 모두 불가능한 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유와 노숙만이 편협되고 생각이 어리석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귀순하여 의탁하려는 것은 현실을 헤아린 것입니다. 주유가 이끄는 군대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가 선봉이 된다면, 정세를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특별히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일까 두렵다. 황개가 만일 신실하다면 당연히 앞뒤를 뛰어넘는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직접 말했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전진했다. 조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려 남군(南郡)을 지켰다. 


강표전: 싸움의 날, 황개는 미리 쾌속선 열척을 준비해, 건조한 물억새와 나무가지들을 배 한가운데 싣고서, 고기 기름을 땔감에 붓고, 붉은 휘장으로 가린채, 기·용번을 선상에 세웠다. 마침 동남의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그래서 열척을 선두에 세운 채, 장강의 한가운데에서 돛을 올렸다. 황개는 불을 손에 들고, 장교들에게 말해해 병사들에게 소리를 외치게 했다.


「항복이다!」


조조의 군인들은 모두 진영을 나와 서서 관람 하고 있었다. 조조군과의 거리가 2리 남짓 되었을 때에, 때를 같이 하고 불을 붙였다. 불은 격렬하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배들은 화살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먼지는 날아 하늘을 뒤덮고, 북방의 배를 다 태워, 물가의 진영까지 연소했다. 주유 등이 경장으로 무장한 정예를 인솔해 적의 후방을 공격하며, 북을 치며 진격하였다. 북군은 대괴멸했고 조공은 철퇴 도주했다.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조조(曹操)가 진군(進軍)하여 강(江) 위쪽에 이르러 적벽(赤璧)을 따라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竹排]을 만들게 하여 부곡(部曲)들로 하여금 그것에 타게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큰 강으로 나왔고 포구(浦口)에 (뗏목을) 대어 놓고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는 또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척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뗏목을 불 지르게 하니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771 -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주유가 강하(江夏)에 주둔하였는데, 조조(曹操)는 적벽(赤璧)을 따라 강남(江南)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氵+箄]을 타고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포구(浦口)에 이르렀으나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가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여척으로 하여금 배마다 50명을 두어 노를 젓게 하고 사람마다 횃불을 들게 하여, 불을 가진 사람 수천 명을 배 위에 세우고 (조조군의) 뗏목으로 모여 들었다. 도착하여 이내 (조조군의 뗏목에) 불을 놓았는데 불이 붙자 배를 돌려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개의 뗏목에 불이 일어나니 불빛이 하늘을 비추었고,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868 -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江陵)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주)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여 포위당했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주]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유비가 주유에게 이르길 :


“조인이 강릉성을 지키는데, 성 안에 양식이 많아, 괴로운 재앙이 되기에 충분하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夏水)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領南郡太守)토록 했다. 하준(下雋), 한창(漢昌), 유양(瀏陽), 주릉(州陵)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領荊州牧)하고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京)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불러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가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유장(劉璋)은 익주목(益州牧)에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張魯)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분위(奮威)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襄陽)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 준비를 하고 파구(巴丘)를 지날 때 병사했다.


신 배송지가 보기로, 주유가 촉을 취하려 들어 강릉으로 돌아와 엄하게 다스리다 이곳에서 죽은 바, 지금의 파릉(
巴陵)과 장소가 맞으며 앞서 "파구(巴丘)에서 진무한" 것과는 이름이 같을 뿐 장소는 다르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애도했는데, 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蕪湖)로 가서 맞이했으며, 모든 비용을 일체 공급했다. 후에 영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묻지 말라.』
 
당초, 주유는 손책에게 좋은 친구로 대우받았고, 태비(太妃)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형의 예로써 받들도록 했다. 이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이었고, 그의 부장들과 빈객들의 그에 대한 예절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주유만은 일찍부터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목하지 못했다.

 
강표전에 이르길: 정보는 자신이 연장자였으므로 자주 주유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주유는 몸을 낮추고 끝까지 거역하지 않았다. 정보는 끝내 감복하여 친하게 지내는 동시에 존중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주공근(주유)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을 마시는 것 같아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


고 했다. 주유가 겸양으로써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한때 조조는 주유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들어, 설득시켜 마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은밀하게 양주(揚州)에 사람을 파견해서 구강(九江)의 장간(蔣幹)으로 하여금 주유를 만나보게 하였다. 장간은 위엄 있는 풍채를 가졌고 재치와 말재간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장강과·회수 지역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여서 아무도 그와 대등하게 맞겨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장간은)이에 평복에 갈건으로 [布衣葛巾], 사적인 여행를 구실로 주유를 방문했다. 주유는 그를 마중나갔지만, (옥외에) 선 채로 장간에 말했다.


"자익(子翼)! 멀리 강호(江湖)까지 몸소 찾아오시다니, 조씨를 위해서 세객(說客)을 하시기 위해서 입니까?"


장간은 말했다.


"그대와 저는 동향 사람인데 당분간 떨어져 있다가, 멀리서 훌륭한 그대의 이야기를 들고, 옛 친구도 찾아보고, 우아한 교화도 구경해볼 겸 온 것일 뿐인데, 그런데도 세객이라고 하시다니, 억측이 아닌가?"(어설픈 번역)


주유는 말했다.


"나는 기(夔)나 사광(師曠)에는 못 미치지만, 현을 듣고 소리를 맛보면, 좋은 곡을 분별할 정도로는 할 수 있습니다."


기(夔):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 시대에 모습은 소처럼 생기되 머리에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뿐이지만 나는 듯이 달리는 괴수가 나타났는데 그 이름을 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요(堯) 임금이 다스릴 때 음률에 정통한 악사(樂師)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도 전설의 괴수와 같은 기였다. 그가 연주하면 온갖 짐승들이 그 음률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출처] 일기이족 (두산백과)


사광(師曠):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 음율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함


그리고 장간을 불러 넣어 주식(酒食)의 연회를 개최했다.


연회의 끝나고, 그를 전송하면서 말했다.


"나는 기밀의 일이 생겨서, 우선은 자리를 관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재차 맞이합시다."


3일 후, 주유는 장간을 불러 함께 군대의 내부를 보고 돌아, 창고의 물자나 무기까지 시찰했다. 돌아와 연회를 열어, 시종이라든가 복식이라든가 진품이라든가라고 하는 것을 그에게 보이게 하고는 장간에게 말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온 이상, 자기 주군을 만났으면, 외면에서는 군신의 도리에 따르고, 내부적으로는 은혜를 묶어, 말과 행동이 그에 따르고 화복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소진(蘇秦:중국 전국 시대(全國時代)의 책사(策士))나 장의(張儀: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모사)가 다시 살아나고, 역이기(酈食其)나 육가(陸賈)가 다시 태어나, 지금 날 설득한다해도, 난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그들의 설득을 거절했을텐데, 왜 자네같은 애송이가 남들을 설득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장간은 단지 웃을 뿐으로,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간은 (북방으로) 귀환하였고, 주유의 아량과 고상함을 칭찬하며, 말로써 주유를 이간 시키는 것을 그만 두었다. 中州之士,亦以此多之。


유비가 경(京)으로부터 되돌아갈 때, 손권은 날아가는 구름 무늬가 있는(飛雲) 큰 배에 타고서, 장소, 진송, 노숙 등 열 명 남짓과 함께 유비를 전송해, 대연회를 개최하고 이별을 고했는데, 장소, 노숙 등이 자리를 비운 뒤, 손권 한 명이 남고 유비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유비는) 이야기가 흘러 나와 주유를 찬미 하며 말했다.


"공근은 문무 주략(籌略 계책과 모략)이 만인의 영웅이니, 그 기량의 광대함을 생각하면, 필시 오랫동안 신하의 상태로는 없을 것입니다."


주유가 위군을 격파했을 때, 조공은 말했다.


"나는 도주를 수치로 하지 않는다."


후에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적벽에서의 패배는, 정확히 질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철수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주유에게는 그와 같은 위명을 주게 되어 버렸어."


주유의 위신과 이름이 먼 곳에서도 소리 높았기 때문에, 조공, 유비는 모두 의혹을 심으려고 그를 비방했던 것이다.


(주유가) 빨리 죽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공근은 왕좌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홀연히 생명이 다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면 좋단 말인가? "


후에 손권은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를 칭했을 때, 공경들에게 말했다.


"주공근이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마신 후일지라도 연주한 음악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유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알아내면 반드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주유)이 돌아본다.』
  
주유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배필은 태자 손등(孫登)이었다. 아들 주순(周循)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도위(騎都尉)로 제수되었고 주유의 풍모가 있었는데, 요절했다.


주순의 동생 주윤(胤)은 처음에 흥업도위(興業都尉)로 임명되었고,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병사 1천 명을 인솔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황룡 원년(229년), 도향후(都鄉侯)로 봉해졌으며, 후에 죄를 범하여 여릉군(廬陵郡)으로 옮겼다.

 
적오 2년(239년),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아들 주윤은 지나친 칭찬을 받아 장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는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받을 수 없을 때는 공을 세우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방종하고 사용에 집착하여 매우 빨리 죄를 지어 처벌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주유는 과거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안으로는 들어오면 심복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면 보좌하는 장수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출정하면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문에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영도(郢都;초 도읍 영郢, 당시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형(蠻荊)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주(周)의 방숙(方叔), 한의 한신(信)이나 영포(布)일지라도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적군을 꺾고 국가의 어려움을 막아낸 신하로서 옛날부터 제왕들에게 귀하게 여겨지고 중요시되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작위를 봉하는 서약서에서 말하기를, "설사 황하가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된 돌처럼 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여 후배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한다." 고 했습니다. 아울러 붉은 글로써 맹서 의식을 융숭히 하고, 종묘 속에 넣어 두고 영원히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신의 후배들로 하여금 대대로 계승하여 자손뿐 아니라 더욱 먼 후대까지도 관심을 기울려 신하의 공덕에 보답하고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경계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유가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 더 슬픕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선 고대의 일을 고찰하여 정사를 영명하게 처리하며, 제후국을 일으키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주윤을 위해 청하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아침을 잘못 알린 닭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울 수 있도록 하고, 죄 지은 신하도 이후에 효락을 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심복이 되어 이전에 공을 세우고 나와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한 자 중에는 주공근이 있었는데, 확실히 잊지 못하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그런데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나와 주공근과의 정의는 당신들 두 사람과의 것과 같은데, 주윤이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멈춰 있겠소? 주윤의 죄악을 구명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오.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한고조의 황하와 태산의 맹서를 간절히 인용하니, 나는 부끄럽소. 비록 나의 덕행은 한고조와 같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오. 주공근의 자식이고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고치도록 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근심이 있겠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朱然)과 전종(全琮)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윤은 병으로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周峻) 역시 주유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관리와 병사 1천 명을 인솔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은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周護)를 장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손권이 말했다.

 
『이전에 조조를 달아나게 하고 형주를 개척한 것은 모두 주공근이 한 일이니, 영원히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주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 주호를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호의 품성과 행실이 음험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관리로 임명하면 화란을 만들 것이기에 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주공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주유전견초

주유(周瑜)는 자가 공근(公瑾)이며, 여강(廬江)군 서(舒)현 사람이다. 당조부(從祖父) 주경(周景)과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나라 태위(太尉)를 지냈다. 부친 주이(周異)는 낙양현의 령(洛陽令)을 지냈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 주경(周景)의 자는 중향(仲嚮)이다. 여려서 염능(廉能)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문에 능하여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어(察) 삼공의 부(公府:관공서)에 초대(辟)되었다. 후에 예주(豫州)자사가 되었을 때, 여남(汝南) 사람 진번(陳蕃)을 불러 별가(別駕)로 해, 영천(潁川)의 이응(李膺), 순곤(荀緄), 두밀(杜密), 폐국(沛國) 사람 주우(朱寓)를 종사(從事)로 삼았는데, 이들은 모두 천하 뛰어난 선비들이었다. 점차 승진해 상서령(尚書令)에 이르렀고, 마침내 태위(太尉)의 지위에 올랐다.





장번(張璠)의 한기(漢紀): 주경(周景)의 아버지는 주영(周榮) 이라고 하여, 장제(章帝), 화제(和帝)의 상서령(尚書令)이 되었다. 처음에 주경은 목이나·태수의 지위를 역임해, 선행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가까이해, 매년 효렴을 추천 할 때, (그 사람들을) 불러와 안방에 오르게 해 가족과 함께 연회를 즐겼다. 그러한 일은 3, 4회나 있고, 전별 금품을 보내기도 해서, 한층 더 그 사람의 자제를 임용해 주었고, 이렇게 말했다,




「移臣作子,於政何有?」

「신하를 옮겨서 자식으로 삼는다면 정치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단사편구라 의미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는데 생각건대 만약 신하를 자식처럼 여기고 천하의 정무를 한 집안의 가사처럼 생각해 치우치지 않은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 이전, 사도(司徒) 한연(韓縯)이 하내(河內)태수 였을 무렵, 공무에 있음에 사사롭지 아니함에, 천거함에 있어서 한마디 말만 해 줄 뿐 이니, 후에 그 집안(문호門戶)에는 (혜택을) 미치지 않았다. 말하려면, 




「나는 좋은 인물을 추천 했던 것이지, 일가를 이루는 혜택은 아니지 않는가.」




당시의 논자에게는 양쪽 모두를 비난 하는 사람이 있었다.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빼어났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그는 집을 서(舒)현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나이가 같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이 남달랐다. 주유는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그의 모친에게 배례했으며,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하며 돕고 살았다. 주유의 당부(從父) 주상(周尚)이 단양태수(丹楊太守)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동쪽으로 건너가려고 역양에 이르러 주유에게 급히 편지를 써서 알리니,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를 얻었으니, 순조로울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횡강(橫江)과 당리(當利)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너 말릉(秣陵)을 공격하고, 착융(笮融)과 설례(薛禮)를 격파시켰으며, 방향을 돌려 호숙(湖孰)과 강승(江乘)을 공격하고 곡아(曲阿)로 진입하자 유요(劉繇)는 달아났으며, 손책의 병사는 수만 명이 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주유에게 말했다.


 

『나는 이 병력이면 오(吳)군과 회계(會)군을 취하고 산월(山越)을 평정하기에 충분하오. 경(卿)은 돌아가 단양을 지키시오.』


 

주유는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원술이 주상을 대신할 태수로 사촌 동생(從弟) 원윤(袁胤)을 보냈으므로,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壽春)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 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는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거소(居巢)현의 장이 되기를 구하여서 길을 빌려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원술은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주유는 거소에서 오로 돌아왔다. 이 해가 건안 3년(198년)이다. 손책은 직접 주유를 영접하고,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將)을 수여하고 즉시 병사 2천과 기마 50필을 주었다.



江表傳曰:策又給瑜鼓吹,為治館舍,贈賜莫與為比。策令曰:「周公瑾英雋異才,與孤有總角之好,骨肉之分。如前在丹楊,發眾及船糧以濟大事,論德酬功,此未足以報者也。」


강표전에 이르길 : 손책은 또한 주유에게 악대를 주고 관사를 꾸며 줬으며 상으로 내린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할 수 없었다. 손책이 명령을 내려 말하길 : 「주공근은 영준하고 빼어난 재능이 있으며 총각시절부터 나와 더불어 친분을 맺어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다. 일전에 단양에서 무리와 배, 식량을 발하여 큰일을 이루어낸 것 같은 경우는 논공행상을 통했다고 해서 충분히 보답한 것이 아니다.」




주유는 당시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周郎)이라고 불렀다.


 

주유의 은덕과 신의는 여강(廬江)에서 빛났다. 손책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우저(牛渚)를 지키도록 하고, 후에 춘곡현의 장을 겸임(領春穀長)토록 했다. 오래지 않아, 손책이 형주를 취하려고 할때, 주유를 중호군(中護軍)으로 임명하고 강하태수를 겸임(領江夏太守)하도록 했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皖)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손책이 주유에게 태연하게 장난을 걸며 말했다.




"교공의 두 딸은 정처없이 떠도는 형편이지만(流離) 우리 2명을 남편으로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또 주유는 심양(尋陽)으로 진격하여 유훈(劉勳)을 격파시켰으며, 강하(江夏)를 토벌하고 예장(豫章)과 여릉(廬陵)을 평정하고 돌아와 파구(巴丘)에 남아서 지켰다.




신송지가 살피니 손책은 이때 처음으로 예장과 여릉을 얻었으나, 아직 강하는 평정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주유가 군대를 주둔시킨 파구는 현재의 파구현(巴丘縣;강서성의 峽江[협강])에 있어야 되며, 후에 그가 죽은 파구(호남성의 岳陽[악양])와는 다른 곳이다.

 

건안 5년(200년), 손책이 죽자, 그의 동생 손권이 일을 맡았다.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상하러 갔다가 오에 머물러 중호군(中護軍)으로써 장사(長史) 장소와 함께 모든 일을 관장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조조(曹操)는 원소(袁紹)를 쳐부순 후 북방을 통일하고 점차 그 세력을 키워 갔다. 건안칠년(202년), 조조는 오나라 손권에게 서신을 보내 임자(任子; 이천석 이상의 관직의 사람이 동복형제나 아들을 추천해서 중앙직으로 보내는 것.)할 것을 질책하였다.


 


손권은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문무백관들을 소집하였다. 장소(張昭), 진송(秦松) 등 여러 사람들은, 미적거리며 결정을 못했다. 손권은 아들을 보내지 않고 장수 주유를 홀로 들어오게 하여 어머니(오부인) 앞에서 논의하여 정하게 하였다.




“예전에 초나라가 처음 책봉되었을 때 100리의 땅도 안 되었습니다. 후계자가 현명하고 유능하여 영토를 넓히고 경계지역을 개척해 마침내 형(荊)과 양(楊)으로부터 남해(南海)까지의 지역을 점거대업을 전하여 복을 이어가기를 90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장군은 아버지와 형님이 남겨준 밑천을 이어받아 6개 군의 무리를 아우르게 되어 군사는 날카롭고 양식은 많으며, 장수와 병사는 명령에 복종하고 있고 산에서 동(鑄)을 주조하고 바다를 끓여서 소금을 만들어 경계 지역 안에서는 부유하고 풍요로우니 민심이 안정되어 사람들은 난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여 배를 타고 나가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돌아올 수 있으니, 우리들의 군대는 강하고 용맹하여 가는 곳마다 적이 없을 것인데 무슨 핍박이 있어서 인질을 보내려 하십니까?




인질이 한 번 들어가면 조씨와는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면 곧 부르는 명령에 가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하면 즉 남에게 통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대접받는다 하여도 일개 후(侯)의 인(印)을 주고 종복 10여 명과 수레는 몇 승 그리고 말은 몇 필에 불과한데 어찌 더불어 남면(南面)해서 고(孤)를 칭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니 서서히 그 변화를 관찰하십시오. 만약 조씨가 의에 따라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다면 장군은 그때 그를 섬겨도 늦지 않습니다. 만약 폭난(暴亂)을 일으키려고 도모한다면 군사는 불과 같아서 병사를 거두지 않으면 장수가 스스로를 불태울테니, 장군께서는 용맹을 감추고 위엄을 겨뤄 천명을 시다리시면 어찌 인질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권의 어머니(오부인)가




"공근(公瑾)의 말이 옳다. 공근은 백부(伯符)와 같은 나이로 한 달이 적을 뿐이다. 나는 그를 아들과 같이 볼 터이니 너는 그를 형으로 섬겨라"





이에 인질을 보내지 않았다.



건안 11년(206년), 그는 손유(孫瑜) 등을 인솔하여 마(麻)둔과 보(保)둔 두 주둔지를 토벌하고, 그곳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으며, 1만여 명을 생포해 군사를 돌려 궁정(官亭)을 지켰다. 강하태수 황조(黃祖)가 부장 등룡(鄧龍)을 보내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시상(柴桑)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유는 추격하여 토벌했으며, 등룡을 생포해 오군으로 보냈다.


 

건안 13년(208년) 봄, 손권이 강하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前部大督)으로 임명했다. 






이 해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항복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장군에게 유리한 형세로 대항할 수 있습니다. 유표는 수군을 훈련시켰고 몽충(蒙衝)이나 투함(鬬艦)이 수천 대 인데, 조조가 이것을 모두 포획하여 장강가에 늘어놓고 아울러 보병도 움직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내려온다면, 이때는 장강이 위험하게 되고, 이미 우리와 공동으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쌍방의 세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또 논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주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 장군은 신명스런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갖고 있고, 겸하여 아버지와 형의 위세에 기대어 강동을 할거하고 수천 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병사는 정예이고 식량은 풍족하며 영웅들은 공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응당 천하를 횡행하며 한왕조를 위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직접 사지로 보내져왔는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을 위해 헤아려보기를 요청합니다. 지금 북방의 영토를 이미 안정시켰고 조조에게 내부의 근심이 없어 시일을 늘려 오랫동안 전쟁터로 와서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와 수면 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지금 북쪽 땅은 평안치 못하고, 게다가 마초와 한수가 오히려 동관 서쪽에 있으면서 조조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을 버리고 수군이 기대어 오나 월과 다투는 것은 본래 중원에서는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현재는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 것이 없고, 중원의 병사들에게 멀리 강호의 땅을 건너도록 하였으므로 물과 땅에 익숙치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용병의 근심거리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함부러 행동했습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잡으려고 하신다면, 족히 오늘이 마땅합니다. 저는 정예병 3만 명을 받아서 하구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을 위해 조조를 무찌를 것을 확신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사악한 적이 한왕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려고 한 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명, 여포, 유표와 나만을 꺼려했을 뿐이요.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강표전: 손권은 칼을 뽑아 앞에 놓은 책상을 때려 부수며 말했다.




"여러분 중에서 다시 조조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오."





그리고는 회견이 끝났다. 이날밤 주유가 배알을 요구해 말했다. 주유가 뵙기를 청하고 말하길:




"모든 사람들이 조조의 서신(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인데, 회의할 때 보여주자 오나라의 모든 신하들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을 보고서 수군과 보병 80만이라는 말에 벌벌 떨고 있지만, 그 허실을 다시 헤아릴 필요도 없는 것으로, 이것에 대해 다시 회의를 여는 것은 더욱 무익한 일입니다. 지금 저들의 실제 (병력수를) 살펴보면, 중국(중원)인들은 불과 15- 16만명인데, 이 또한 군사들이 이미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지쳤으며, 유표의 군대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7-8만명 뿐이고 이들은 또한 의심을 품어 조조군에 완전히 편입된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병든 병사와 의심하는 병사들은 비록 군사가 많다고 하더라도 두려워 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정병 5만명을 주시면 제압할 수 있으니, 장군께선 근심하지 마십시오."





손권은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공근, 경이 그렇게 말을 해주니 고(孤)의 맘이 풀어지는구려.  자포(子布: 장소張昭)와 문표(文表; 진송秦松) 등등의 여러 사람들은 각각 자기 처와 아들딸를 돌아보는 등 사사로운 것만 생각하여 고를 크게 실망시켰소. 오직 경과 자경(子敬노숙)만이 고에게 찬동 해주니 이것은 하늘이 경들 두 명을 보내 고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오. 5만의 군세를 갑자기 모으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미 3만명을 선발해 놓았고, 함선·식량·무기 등은 모두 갖추어지고 있소. 경은 자경과 정공(程公정보)과 함께 먼저 출발하시오. 고는 곧 뒤따라 군대를 출발시켜 다량의 물자·식량을 싣고가 경을 후원하도록 하겠소. 경은 조조군을 잘 다룰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시오.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 곧 바로 귀환해 고에게 달려와 주시오. 그때는 마땅히 고가 맹덕(孟德;조조)과 결판을 낼 것이오"




신송지가 보건데 조조에게 대항할 방침을 세운 것은 사실상 노숙이었다. 당시 주유는 파양으로 파견되었었는데, 노숙이 주유를 불러서 손권에게 권하도록 했다. 주유가 파양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노숙과 은밀히 생각을 합쳤기 때문에 함께 공훈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전(주유전), 손권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묻자, 사람들의 의견을 제지시키고, 혼자만 거절할 계책을 말했다고 했다. 이것은 노숙보다 앞서 도모한 것이 아니므로, 노숙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當陽)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夏口)에 주둔하고는 제갈량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토록 했다. 손권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 군대는 적벽(赤壁)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南岸)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이때 황개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저 황개는 손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며, 언제나 장수를 맡았고, 받은 예우는 얇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천하가 이루어질 때에는 큰 형세가 있어야만 하고, 강동은 육군과 산월 사람들로 중국(중원)의 백만 병력을 감당한다는 것이 중과부적임은 천하가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오)의 부장들도 어리석든 어질든 간에 모두 불가능한 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유와 노숙만이 편협되고 생각이 어리석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귀순하여 의탁하려는 것은 현실을 헤아린 것입니다. 주유가 이끄는 군대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가 선봉이 된다면, 정세를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특별히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일까 두렵다. 황개가 만일 신실하다면 당연히 앞뒤를 뛰어넘는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직접 말했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전진했다. 조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려 남군(南郡)을 지켰다. 




강표전: 싸움의 날, 황개는 미리 쾌속선 열척을 준비해, 건조한 물억새와 나무가지들을 배 한가운데 싣고서, 고기 기름을 땔감에 붓고, 붉은 휘장으로 가린채, 기·용번을 선상에 세웠다. 마침 동남의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그래서 열척을 선두에 세운 채, 장강의 한가운데에서 돛을 올렸다. 황개는 불을 손에 들고, 장교들에게 말해해 병사들에게 소리를 외치게 했다.




「항복이다!」




조조의 군인들은 모두 진영을 나와 서서 관람 하고 있었다. 조조군과의 거리가 2리 남짓 되었을 때에, 때를 같이 하고 불을 붙였다. 불은 격렬하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배들은 화살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먼지는 날아 하늘을 뒤덮고, 북방의 배를 다 태워, 물가의 진영까지 연소했다. 주유 등이 경장으로 무장한 정예를 인솔해 적의 후방을 공격하며, 북을 치며 진격하였다. 북군은 대괴멸했고 조공은 철퇴 도주했다.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조조(曹操)가 진군(進軍)하여 강(江) 위쪽에 이르러 적벽(赤璧)을 따라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竹排]을 만들게 하여 부곡(部曲)들로 하여금 그것에 타게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큰 강으로 나왔고 포구(浦口)에 (뗏목을) 대어 놓고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는 또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척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뗏목을 불 지르게 하니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771 -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주유가 강하(江夏)에 주둔하였는데, 조조(曹操)는 적벽(赤璧)을 따라 강남(江南)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氵+箄]을 타고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포구(浦口)에 이르렀으나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가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여척으로 하여금 배마다 50명을 두어 노를 젓게 하고 사람마다 횃불을 들게 하여, 불을 가진 사람 수천 명을 배 위에 세우고 (조조군의) 뗏목으로 모여 들었다. 도착하여 이내 (조조군의 뗏목에) 불을 놓았는데 불이 붙자 배를 돌려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개의 뗏목에 불이 일어나니 불빛이 하늘을 비추었고,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868 -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江陵)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주)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여 포위당했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주]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유비가 주유에게 이르길 :




“조인이 강릉성을 지키는데, 성 안에 양식이 많아, 괴로운 재앙이 되기에 충분하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夏水)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領南郡太守)토록 했다. 하준(下雋), 한창(漢昌), 유양(瀏陽), 주릉(州陵)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領荊州牧)하고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京)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불러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가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유장(劉璋)은 익주목(益州牧)에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張魯)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분위(奮威)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襄陽)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 준비를 하고 파구(巴丘)를 지날 때 병사했다.



신 배송지가 보기로, 주유가 촉을 취하려 들어 강릉으로 돌아와 엄하게 다스리다 이곳에서 죽은 바, 지금의 파릉(巴陵)과 장소가 맞으며 앞서 "파구(巴丘)에서 진무한" 것과는 이름이 같을 뿐 장소는 다르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애도했는데, 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蕪湖)로 가서 맞이했으며, 모든 비용을 일체 공급했다. 후에 영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묻지 말라.』

 

당초, 주유는 손책에게 좋은 친구로 대우받았고, 태비(太妃)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형의 예로써 받들도록 했다. 이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이었고, 그의 부장들과 빈객들의 그에 대한 예절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주유만은 일찍부터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목하지 못했다.


 

강표전에 이르길: 정보는 자신이 연장자였으므로 자주 주유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주유는 몸을 낮추고 끝까지 거역하지 않았다. 정보는 끝내 감복하여 친하게 지내는 동시에 존중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주공근(주유)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을 마시는 것 같아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




고 했다. 주유가 겸양으로써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한때 조조는 주유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들어, 설득시켜 마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은밀하게 양주(揚州)에 사람을 파견해서 구강(九江)의 장간(蔣幹)으로 하여금 주유를 만나보게 하였다. 장간은 위엄 있는 풍채를 가졌고 재치와 말재간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장강과·회수 지역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여서 아무도 그와 대등하게 맞겨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장간은)이에 평복에 갈건으로 [布衣葛巾], 사적인 여행를 구실로 주유를 방문했다. 주유는 그를 마중나갔지만, (옥외에) 선 채로 장간에 말했다.




"자익(子翼)! 멀리 강호(江湖)까지 몸소 찾아오시다니, 조씨를 위해서 세객(說客)을 하시기 위해서 입니까?"





장간은 말했다.




"그대와 저는 동향 사람인데 당분간 떨어져 있다가, 멀리서 훌륭한 그대의 이야기를 들고, 옛 친구도 찾아보고, 우아한 교화도 구경해볼 겸 온 것일 뿐인데, 그런데도 세객이라고 하시다니, 억측이 아닌가?"(어설픈 번역)





주유는 말했다.




"나는 기(夔)나 사광(師曠)에는 못 미치지만, 현을 듣고 소리를 맛보면, 좋은 곡을 분별할 정도로는 할 수 있습니다."




기(夔):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 시대에 모습은 소처럼 생기되 머리에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뿐이지만 나는 듯이 달리는 괴수가 나타났는데 그 이름을 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요(堯) 임금이 다스릴 때 음률에 정통한 악사(樂師)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도 전설의 괴수와 같은 기였다. 그가 연주하면 온갖 짐승들이 그 음률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출처] 일기이족 (두산백과)





사광(師曠):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 음율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함




그리고 장간을 불러 넣어 주식(酒食)의 연회를 개최했다.




연회의 끝나고, 그를 전송하면서 말했다.




"나는 기밀의 일이 생겨서, 우선은 자리를 관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재차 맞이합시다."





3일 후, 주유는 장간을 불러 함께 군대의 내부를 보고 돌아, 창고의 물자나 무기까지 시찰했다. 돌아와 연회를 열어, 시종이라든가 복식이라든가 진품이라든가라고 하는 것을 그에게 보이게 하고는 장간에게 말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온 이상, 자기 주군을 만났으면, 외면에서는 군신의 도리에 따르고, 내부적으로는 은혜를 묶어, 말과 행동이 그에 따르고 화복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소진(蘇秦:중국 전국 시대(全國時代)의 책사(策士))나 장의(張儀: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모사)가 다시 살아나고, 역이기(酈食其)나 육가(陸賈)가 다시 태어나, 지금 날 설득한다해도, 난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그들의 설득을 거절했을텐데, 왜 자네같은 애송이가 남들을 설득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장간은 단지 웃을 뿐으로,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간은 (북방으로) 귀환하였고, 주유의 아량과 고상함을 칭찬하며, 말로써 주유를 이간 시키는 것을 그만 두었다. 中州之士,亦以此多之。





유비가 경(京)으로부터 되돌아갈 때, 손권은 날아가는 구름 무늬가 있는(飛雲) 큰 배에 타고서, 장소, 진송, 노숙 등 열 명 남짓과 함께 유비를 전송해, 대연회를 개최하고 이별을 고했는데, 장소, 노숙 등이 자리를 비운 뒤, 손권 한 명이 남고 유비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유비는) 이야기가 흘러 나와 주유를 찬미 하며 말했다.




"공근은 문무 주략(籌略 계책과 모략)이 만인의 영웅이니, 그 기량의 광대함을 생각하면, 필시 오랫동안 신하의 상태로는 없을 것입니다."





주유가 위군을 격파했을 때, 조공은 말했다.




"나는 도주를 수치로 하지 않는다."





후에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적벽에서의 패배는, 정확히 질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철수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주유에게는 그와 같은 위명을 주게 되어 버렸어."





주유의 위신과 이름이 먼 곳에서도 소리 높았기 때문에, 조공, 유비는 모두 의혹을 심으려고 그를 비방했던 것이다.





(주유가) 빨리 죽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공근은 왕좌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홀연히 생명이 다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면 좋단 말인가? "





후에 손권은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를 칭했을 때, 공경들에게 말했다.





"주공근이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마신 후일지라도 연주한 음악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유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알아내면 반드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주유)이 돌아본다.』

  

주유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배필은 태자 손등(孫登)이었다. 아들 주순(周循)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도위(騎都尉)로 제수되었고 주유의 풍모가 있었는데, 요절했다.




주순의 동생 주윤(周胤)은 처음에 흥업도위(興業都尉)로 임명되었고,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병사 1천 명을 인솔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황룡 원년(229년), 도향후(都鄉侯)로 봉해졌으며, 후에 죄를 범하여 여릉군(廬陵郡)으로 옮겼다.


 

적오 2년(239년),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아들 주윤은 지나친 칭찬을 받아 장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는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받을 수 없을 때는 공을 세우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방종하고 사용에 집착하여 매우 빨리 죄를 지어 처벌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주유는 과거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안으로는 들어오면 심복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면 보좌하는 장수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출정하면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문에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영도(郢都;초 도읍 영郢, 당시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형(蠻荊)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주(周)의 방숙(方叔), 한의 한신(信)이나 영포(布)일지라도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적군을 꺾고 국가의 어려움을 막아낸 신하로서 옛날부터 제왕들에게 귀하게 여겨지고 중요시되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작위를 봉하는 서약서에서 말하기를, "설사 황하가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된 돌처럼 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여 후배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한다." 고 했습니다. 아울러 붉은 글로써 맹서 의식을 융숭히 하고, 종묘 속에 넣어 두고 영원히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신의 후배들로 하여금 대대로 계승하여 자손뿐 아니라 더욱 먼 후대까지도 관심을 기울려 신하의 공덕에 보답하고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경계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유가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 더 슬픕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선 고대의 일을 고찰하여 정사를 영명하게 처리하며, 제후국을 일으키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주윤을 위해 청하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아침을 잘못 알린 닭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울 수 있도록 하고, 죄 지은 신하도 이후에 효락을 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심복이 되어 이전에 공을 세우고 나와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한 자 중에는 주공근이 있었는데, 확실히 잊지 못하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그런데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나와 주공근과의 정의는 당신들 두 사람과의 것과 같은데, 주윤이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멈춰 있겠소? 주윤의 죄악을 구명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오.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한고조의 황하와 태산의 맹서를 간절히 인용하니, 나는 부끄럽소. 비록 나의 덕행은 한고조와 같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오. 주공근의 자식이고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고치도록 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근심이 있겠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朱然)과 전종(全琮)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윤은 병으로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周峻) 역시 주유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관리와 병사 1천 명을 인솔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은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周護)를 장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손권이 말했다.


 

『이전에 조조를 달아나게 하고 형주를 개척한 것은 모두 주공근이 한 일이니, 영원히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주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 주호를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호의 품성과 행실이 음험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관리로 임명하면 화란을 만들 것이기에 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주공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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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오서

조회 수 : 49568 등록일 : 2013.05.01 01:38:30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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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05.01 10:53:18 (*.0.203.41)

오타 하며금->하여금 수정과 주석에 "추가 하고 개행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06.01 22:05:30 (*.52.89.87)

세웠따와 교현 등의 몇 가지 오류 수정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06.23 16:11:13 (*.52.89.88)

주석 엄청 빠져있더군요. 대량으로 추가했습니다.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07.02 00:00:45 (*.52.89.88)

하역므->하여금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07.15 16:29:34 (*.0.203.172)

모든 주석 추가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09.04 19:34:46 (*.52.91.247)

장비-주유 얘기는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75458897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09.07 12:17:59 (*.52.91.247)

所向無敵 고사는 내용이 원문과 많이 달라서 몇 개 끼워 맞춰서 수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3.10.04 10:46:46 (*.166.245.168)

주유 죽을 때 파구는 글라우룽님 번역입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269797&page=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6.02.01 02:22:34 (*.55.70.71)

신하를 자식처럼 여긴다는 부분과 강표전에서 손책이 주유에게 단양의 일을 보답 못할 것이라는 부분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주석이 번역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18.10.17 21:37:06 (*.74.126.228)

작융->착융으로 수정

댓글

살류쥬2020.05.11 01:43:22 (*.64.91.45)

주유가 임종 직전 손권에게 보낸 편지 글이(노숙을 천거하는 글, 사람이 죽을 때 말이 착하다 운운한 글) 두 개가 빠졌군요.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0.05.11 06:39:30 (*.153.81.156)

해당 부분 원문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댓글

서영2020.09.06 03:03:17 (*.39.155.246)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 원문은 이렇습니다. '分此二人,各置一方,使如瑜者得挾與攻戰,大事可定也'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이 두 사람(관우와 장비)를 나누어 각기 한 방면에 배치하고 저 주유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얻어서 끼게하고 더불어 공격하여 싸우도록 하면, 대사는 가히 정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바꾸면 좋을거 같습니다.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0.09.07 14:46:44 (*.112.38.50)

1. 뒷부분 짤렸어요.

2. 괄호가 들어가냐 안 들어가냐 차이 아닌가요??? 가독성만 해칠 것 같은데 말이죠.

댓글

서영2020.09.11 02:55:40 (*.226.208.249)

뒷부분이 짤렸다니 다시 적습니다.

원문: '分此二人,各置一方,使如瑜者得挾與攻戰,大事可定也'


현재 번역: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번역: '이 두 사람(관우와 장비)를 나누어 각기 한 방면에 배치하고 저 주유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얻어서 끼게하여 더불어 공격해 싸우도록 하면, 대사는 가히 정해질 것입니다.'


본문에도 괄호가 들어간 문장은 있고 가독성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 번역에서 잘라먹은 요소를 살리려고 했구요. 원 번역에서는 '이 두사람', '저 주유 같은 자'

'얻어서 끼게하여 더블어 공격해 싸우도록 하면' 같이 빠진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추가해서 번역했습니다.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0.09.15 20:07:31 (*.153.81.156)

관우 장비 이 두 사람을 -> 이 두 사람(관우 장비)

로 수정한다는 건데 아무리 봐도 개악.


저 같은 자

->저 주유 같은 자

의미 차이 없다 봄.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

(그들을) 얻어서 끼게하여 더불어 공격해


'얻어서 끼게하여 더불어 공격해'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문장을 지휘하여로 바꾸는게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면 제대로 된 번역을 단순하게 한자를 한국어로 1:1 대칭 시킨 형태로 변환시킨건데 이게 왜 더 나은 번역인지 절 설득해주세요. 이렇게 하면 뜻에 어긋남이 있어 완전 잘못된 의미로 전달이 되는건가요?

댓글

서영2020.09.16 06:07:30 (*.39.130.173)

알겠습니다. 저도 굳이 말같지도 않은 소리 얘기 들어가면서 님께 강요하자는건 아니니까요. 그냥 댓글로만 남기겠습니다.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1.06.14 13:07:52 (*.46.121.71)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이는 것이 아닌가 두렵다. 황개가 만일 진실하다면 당연히 전례를 뛰어넘는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

부분 주석인데 본문과 중복해서 들어가 있어 삭제합니다.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1.08.10 13:14:08 (*.46.121.71)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손책이 주유에게 태연하게 장난을 걸며 말했다.


"교공의 두 딸이 비록 훤하게 잘났다지만, 우리 둘을 얻어 남편으로 삼았으니 그들도 아주 신이 날 것이오."

-------------------------------------

이 부분의 경우 橋公二女雖流離,得吾二人作婿,亦足為歡인데 Rafe 씨는

"교공의 두 딸은 유민에 불과하지만, 이제 우리 둘을 얻어 남편으로 삼았으니 행복에 필요한 것은 다 갖추었구려"


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분이 확인 후에 반영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하겠습니다.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08.10 21:34:46 (*.64.157.224)

橋公의 二女는 雖비록 流離유리(정처없이 떠도는) 지만,得얻었으니 吾二人우리 2인 作婿사위,亦어찌 足족하지 為歡기쁨이


직역이고요. 최대한 원문에 맞게 반영하심이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1.08.10 21:45:26 (*.74.127.196)

넵 그럼


'교공의 두 딸은 정처없이 떠도는 형편이지만(流離) 우리 2명을 남편으로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정도로 하겠습니다. 혹시 이상하면 구라뱅뱅님 포함 댓글 달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08.12 17:05:03 (*.21.49.97)

이름/지명/관직 한자 병행 표기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08.12 17:29:09 (*.114.89.66)

不令恩偏稱一家也

번역이 잘린듯 싶어서 의역합니다.

기존 : 은애를 하나의 집편등 좁아

변경 : 일가를 이루는 혜택은 아니지 않는가.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08.13 09:09:32 (*.21.49.97)

會策將東渡,到歷陽,馳書報瑜,瑜將兵迎策。

전) 마침 손책이 역양까지 있었으므로 급히 편지를 써서 주유에게 알렸다.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후) 손책은 모여서 장차 동쪽으로 건너가려, 역양에 이르니, 주유에게 급히 편지를 써서 알리니,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08.13 15:00:31 (*.21.49.97)

손책은 모여서 장차 동쪽으로 건너가려 -> 마침 손책이 동쪽으로 건너가려고 역양에 이르니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1.09.17 23:00:13 (*.219.68.249)

건안 13년을 209에서 208로 수정


예장(豫章)과 여릉(廬陵)을

->

예장(豫章)과 여릉(廬陵)으로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1.10.02 01:36:02 (*.219.68.249)

權撫背曰:「公瑾,卿言至此,甚合孤心。子布、文表諸人,各顧妻子,挾持私慮,深失所望,獨卿與子敬與孤同耳,此天以卿二人贊孤也。五萬兵難卒合,已選三萬人,船糧戰具俱辦,卿與子敬、程公便在前發,孤當續發人眾,多載資糧,為卿後援。卿能辦之者誠決,邂逅不如意,便還就孤,孤當與孟德決之。」


"공근!, 경이 이렇게 말을 해주니 내 맘이 풀어주는군요. 자포(子布: 장소(張昭))와 문표(文表; 진송秦松) 등등의 여러 사람들은 각각 자기 처와 아들딸를 돌아보는 등 사사로운 것만 생각하여, 나를 크게 실망시켰오. 단지 경과 자경만이 저에게 찬동 해 주었다. 이것은 하늘이 경들 두 명에 통해서 저를 도와 주고 있다고 봅니다. 5만의 군세를 갑자기 모으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미 3만명을 선발해 놓았고, 함선·식량·무기 등은 모두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경은 자경(노숙)과 정공(정보)과 함께 먼저 출발하시오. 저는 곧 뒤따라 군대를 출발시키겠소. 다량의 물자·식량을 탑재해 경의 후원을 돕도록 하겠오. 경은 조조군을 잘 다룰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시오. 생각 했던 대로가 되지 않으면, 곧 바로 귀환해 저에게 달려와 주시오. 제가 고가 조조와 결판을 붙일 것이다."



======================================================


"공근, 경이 그렇게 말을 해주니 고(孤)의 맘이 풀어지는구려. 자포(子布: 장소張昭)와 문표(文表; 진송秦松) 등등의 여러 사람들은 각각 자기 처와 아들딸를 돌아보는 등 사사로운 것만 생각하여 고를 크게 실망시켰소. 오직 경과 자경(子敬노숙)만이 고에게 찬동 해주니 이것은 하늘이 경들 두 명을 보내 고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오. 5만의 군세를 갑자기 모으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미 3만명을 선발해 놓았고, 함선·식량·무기 등은 모두 갖추어지고 있소. 경은 자경과 정공(程公정보)과 함께 먼저 출발하시오. 고는 곧 뒤따라 군대를 출발시켜 다량의 물자·식량을 싣고가 경을 후원하도록 하겠소. 경은 조조군을 잘 다룰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시오.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 곧 바로 귀환해 고에게 달려와 주시오. 그때는 마땅히 고가 맹덕(孟德;조조)과 결판을 낼 것이오"




======================



대부분은 저->고(孤) 로 바꾸고 문장 정리한 거.


다른 거 뜻은 다 괜찮은 것 같은데


卿能辦之者誠決

경은 조조군을 잘 다룰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시오.



이 부분이 좀 그렇군여.

댓글

공근2021.11.08 14:56:43 (*.153.31.142)

"공근은 왕좌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홀연히 생명이 다했다. 난는 무엇을 의지하면 좋단 말인가?"


난는은 나는의 오타인것 같습니다

삭제 수정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11.09 13:17:31 (*.21.49.97)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11.09 13:37:40 (*.21.49.97)

때문에 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현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故能摧曹操於烏林,走曹仁於郢都,揚國威德,華夏是震,蠢爾蠻荊,莫不賔服,


오림烏林을 적벽으로 하고, 영도郢都(초 도읍 영郢)를 강릉으로 한 번역은 의역이라 보면 되겠는데요.

蠢爾蠻荊 : 어리석은 만형(蠻荊 : 옛 초나라를 말하는 -남쪽오랑캐) 으로 수정은 적용합니다.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11.09 15:54:14 (*.21.49.97)

설사 황하가 어리띠처럼 되고 -> 설사 황하가 허리띠처럼 되고 (오타 수정, 허리띠)

댓글

코렐솔라코렐솔라2021.12.10 12:26:12 (*.63.45.112)

개인적으로 신경 많이 쓰는 부분이라 수정할께요. 양해 부탁드려요.

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

때문에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영도(郢都;초 도읍 영郢, 당시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댓글

adsfasdf2021.11.13 23:29:58 (*.217.122.136)

"공근의 문무 계략은 만명 뛰어난 사람입니다.

->

「公瑾文武籌略,萬人之英

공근은 문무 주략(계책과 모략)이 만인의 영웅(만인지영)이니

댓글

번역가구라뱅뱅2021.11.15 12:12:37 (*.21.49.97)

수정 반영하였습니다.


보다보니, 누락된 원문이 있길래 추가했습니다. (中州之士,亦以此多之。)


《吳志九》[查看正文] [修改] [查看歷史]

《周瑜傳》

1 周瑜字



公瑾,廬江舒人也。從祖父景,景子忠,皆為漢太尉。

2 謝承後漢書曰:景字仲嚮,少以廉能見稱,以明學察孝廉,辟公府。後為豫州刺史,辟汝南陳蕃為別駕,潁川李膺、荀緄、杜密、沛國朱㝢為從事,皆天下英俊之士也。稍遷至尚書令,遂登太尉。張璠漢紀曰:景父榮,章、和世為尚書令。初景歷位牧守,好善愛士,每歲舉孝廉,延請入,上後堂,與家人宴會,如此者數四。及贈送旣備,又選用其子弟,常稱曰:「移臣作子,於之何有?」先是,司徒韓縯為河內太守,在公無私,所舉一辭而已,後亦不及其門戶,曰:「我舉若可矣,不令恩偏稱一家也。」當時論者,或兩譏焉。父異,洛陽令。

3 瑜長壯有姿貌。初,孫堅興義兵討董卓,徙家於舒。堅子策與瑜同年,獨相友善,瑜推道南大宅以舍策,升堂拜母,有無通共。瑜從父尚為丹楊太守,瑜往省之。會策將東渡,到歷陽,馳書報瑜,瑜將兵迎策。策大喜曰:「吾得卿,諧也。」遂從攻橫江、當利,皆拔之。乃渡擊秣陵,破笮融、薛禮,轉下湖孰、江乘,進入曲阿,劉繇奔走,而策之衆已數萬矣。因謂瑜曰:「吾以此衆取吳會平山越已足。卿還鎮丹楊。」瑜還。頃之,袁術遣從弟胤代尚為太守,而瑜與尚俱還壽春。術欲以瑜為將,瑜觀術終無所成,故求為居巢長,欲假塗東歸,術聽之。遂自居巢還吳。是歲,建安三年也。策親自迎瑜,授建威中郎將,即與兵二千人,騎五十匹。江表傳曰:策又給瑜鼓吹,為治館舍,贈賜莫與為比。策令曰:「周公瑾英雋異才,與孤有總角之好,骨肉之分。如前在丹楊,發衆及船糧以濟大事,論德酬功,此未足以報者也。」瑜時年二十四,吳中皆呼為周郎。以瑜恩信著於廬江,出備牛渚,後領春穀長。頃之,策欲取荊州,以瑜為中護軍,領江夏太守,從攻皖,拔之。時得橋公兩女,皆國色也。策自納大橋,瑜納小橋。江表傳曰:策從容戲瑜曰:「橋公二女雖流離,得吾二人作壻,亦足為歡。」復進尋陽,破劉勳,討江夏,還定豫章、廬陵,留鎮巴丘。臣松之案:孫策于時始得豫章、廬陵,尚未能得定江夏。瑜之所鎮,應在今巴丘縣也,與後所平巴丘處不同。

4 五年,策薨,權統事。瑜將兵赴喪,遂留吳,以中護軍與長史張昭共掌衆事。江表傳曰:曹公新破袁紹,兵威日盛,建安七年,下書責權質任子。權召羣臣會議,張昭、秦松等猶豫不能決,權意不欲遣質,乃獨將瑜詣母前定議,瑜曰:「昔楚國初封於荊山之側,不滿百里之地,繼嗣賢能,廣土開境,立基於郢,遂據荊揚,至於南海,傳業延祚,九百餘年。今將軍承父兄餘資,六郡之衆,兵精糧多,將士用命,鑄山為銅,煑海為鹽,境內富饒,人不思亂,汎舟舉帆,朝發夕到,士風勁勇,所向無敵,有何偪迫,而欲送質?質一入,不得不與曹氏相首尾,與相首尾,則命召不得不往,便見制於人也。極不過一侯印,僕從十餘人,車數乘,馬數匹,豈與南靣稱孤同哉?不如勿遣,徐觀其變。若曹氏能率義以正天下,將軍事之未晚。若圖為暴,亂兵猶火也,不戢將自焚。將軍韜勇抗威,以待天命,何送質之有!」權母曰:「公瑾議是也。公瑾與伯符同年,小一月耳,我視之如子也,汝其兄事之。」遂不送質。十一年,督孫瑜等討麻、保二屯,梟其渠帥,囚俘萬餘口,還備官亭。江夏太守黃祖遣將鄧龍將兵數千人入柴桑,瑜追討擊,生虜龍送吳。

5 十三年春,權討江夏,瑜為前部大督。其年九月,曹公入荊州,劉琮舉衆降,曹公得其水軍,船步兵數十萬,將士聞之皆恐。權延見羣下,問以計策。議者咸曰:「曹公豺虎也,然託名漢相,挾天子以征四方,動以朝廷為辭,今日拒之,事更不順。且將軍大勢,可以拒操者,長江也。今操得荊州,掩有其地,劉表治水軍,蒙衝鬬艦,乃以千數,操悉浮以沿江,兼有步兵,水陸俱下,此為長江之險,已與我共之矣。而勢力衆寡,又不可論。愚謂大計不如迎之。」瑜曰:「不然。操雖託名漢相,其實漢賊也。將軍以神武雄才,兼仗父兄之烈,割據江東,地方數千里,兵精足用,英雄樂業,尚當橫行天下,為漢家除殘去穢。況操自送死,而可迎之邪?請為將軍籌之:今使北土已安,操無內憂,能曠日持乆來爭疆場,又能與我校勝負於船楫可乎?今北土旣未平安,加馬超、韓遂尚在關西,為操後患。且舍鞌馬,杖舟楫,與吳越爭衡,本非中國所長。又今盛寒,馬無槀草,驅中國士衆遠涉江湖之閒,不習水土,必生疾病。此數四者,用兵之患也,而操皆冒行之。將軍禽操,宜在今日。瑜請得精兵三萬人,進住夏口,保為將軍破之。」權曰:「老賊欲廢漢自立乆矣,徒忌二袁、呂布、劉表與孤耳。今數雄已滅,惟孤尚存,孤與老賊,勢不兩立。君言當擊,甚與孤合,此天以君授孤也。」江表傳曰:權拔刀斫前奏案曰:「諸將吏敢復有言當迎操者,與此案同!」及會罷之夜,瑜請見曰:「諸人徒見操書,言水步八十萬,而各恐懾,不復料其虛實,便開此議,甚無謂也。今以實校之,彼所將中國人,不過十五六萬,且軍已久疲,所得表衆,亦極七八萬耳,尚懷狐疑。夫以疲病之卒,御狐疑之衆,衆數雖多,甚未足畏。得精兵五萬,自足制之,願將軍勿慮。」權撫背曰:「公瑾,卿言至此,甚合孤心。子布、元表諸人,各顧妻子,挾持私慮,深失所望,獨卿與子敬與孤同耳,此天以卿二人贊孤也。五萬兵難卒合,已選三萬人,船糧戰具俱辦,卿與子敬、程公便在前發,孤當續發人衆,多載資糧,為卿後援。卿能辦之者誠決,邂逅不如意,便還就孤,孤當與孟德決之。」臣松之以為建計拒曹公,實始魯肅。于時周瑜使鄱陽,肅勸權呼瑜,瑜使鄱陽還,但與肅闇同,故能共成大勳。本傳直云,權延見羣下,問以計策,瑜擺衆人之議,獨言抗拒之計,了不云肅先有謀,殆為攘肅之善也。

6 時劉備為曹公所破,欲引南渡江,與魯肅遇於當陽,遂共圖計,因進住夏口,遣諸葛亮詣權,權遂遣瑜及程普等與備并力逆曹公,遇於赤壁。時曹公軍衆已有疾病,初一交戰,公軍敗退,引次江北。瑜等在南岸。瑜部將黃蓋曰:「今寇衆我寡,難與持乆。然觀操軍船艦首尾相接,可燒而走也。」乃取蒙衝鬬艦數十艘,實以薪草,膏油灌其中,裹以帷幕,上建牙旗,先書報曹公,欺以欲降。江表傳載蓋書曰:「蓋受孫氏厚恩,常為將帥,見遇不薄。然顧天下事有大勢,用江東六郡山越之人,以當中國百萬之衆,衆寡不敵,海內所共見也。東方將吏,無有愚智,皆知其不可,惟周瑜、魯肅偏懷淺戇,意未解耳。今日歸命,是其實計。瑜所督領,自易摧破。交鋒之日,蓋為前部,當因事變化,效命在近。」曹公特見行人,密問之,口勑曰:「但恐汝詐耳。蓋若信實,當授爵賞,超於前後也。」又豫備走舸,各繫大船後,因引次俱前。曹公軍吏士皆延頸觀望,指言蓋降。蓋放諸船,同時發火。時風盛猛,悉延燒岸上營落。頃之,煙炎張天,人馬燒溺死者甚衆,軍遂敗退,還保南郡。江表傳曰:至戰日,蓋先取輕利艦十舫,載燥荻枯柴積其中,灌以魚膏,赤幔覆之,建旌旗龍幡於艦上。時東南風急,因以十艦最著前,中江舉帆,蓋舉火白諸校,使衆兵齊聲大叫曰:「降焉!」操軍人皆出營立觀。去北軍二里餘,同時發火,火烈風猛,往船如箭,飛埃絕爛,燒盡北船,延及岸邊營柴。瑜等率輕銳尋繼其後,雷鼓大進,北軍大壞,曹公退走。備與瑜等復共追。曹公留曹仁等守江陵城,徑自北歸。

7 瑜與程普又進南郡,與仁相對,各隔大江。兵未交鋒,吳錄曰:備謂瑜云:「仁守江陵城,城中糧多,足為疾害。使張益德將千人隨卿,卿分二千人追我,相為從夏水入截仁後,仁聞吾入必走。」瑜以二千人益之。瑜即遣甘寧前據夷陵。仁分兵騎別攻圍寧。寧告急於瑜。瑜用呂蒙計,留凌統以守其後,身與蒙上救寧。寧圍旣解,乃渡屯北岸,克期大戰。瑜親跨馬擽陣,會流矢中右脅,瘡甚,便還。後仁聞瑜卧未起,勒兵就陣。瑜乃自興,案行軍營,激揚吏士,仁由是遂退。

8 權拜瑜偏將軍,領南郡太守。以下雋、漢昌、瀏陽、州陵為奉邑,屯據江陵。劉備以左將軍領荊州牧,治公安。備詣京見權,瑜上疏曰:「劉備以梟雄之姿,而有關羽、張飛熊虎之將,必非乆屈為人用者。愚謂大計宜徙備置吳,盛為築宮室,多其美女玩好,以娛其耳目,分此二人,各置一方,使如瑜者得挾與攻戰,大事可定也。今猥割土地以資業之,聚此三人,俱在疆場,恐蛟龍得雲雨,終非池中物也。」權以曹公在北方,當廣擥英雄,又恐備難卒制,故不納。

9 是時劉璋為益州牧,外有張魯寇侵,瑜乃詣京見權曰:「今曹操新折衂,方憂在腹心,未能與將軍道兵相事也。乞與奮威俱進取蜀,得蜀而并張魯,因留奮威固守其地,好與馬超結援。瑜還與將軍據襄陽以蹙操,北方可圖也。」權許之。瑜還江陵,為行裝,而道於巴丘病卒,臣松之案,瑜欲取蜀,還江陵治嚴,所卒之處,應在今之巴陵,與前所鎮巴丘,名同處異也。時年三十六。權素服舉哀,感慟左右。喪當還吳,又迎之蕪湖,衆事費度,一為供給。後著令曰:「故將軍周瑜、程普,其有人客,皆不得問。」初瑜見友於策,太妃又使權以兄奉之。是時權位為將軍,諸將賔客為禮尚簡,而瑜獨先盡敬,便執臣節。性度恢廓,大率為得人,惟與程普不睦。江表傳曰:普頗以年長數陵侮瑜。瑜折節容下,終不與校。普後自敬服而親重之,乃告人曰:「與周公瑾交,若飲醇醪,不覺自醉。」時人以其謙讓服人如此。初曹公聞瑜年少有美才,謂可游說動也,乃密下揚州,遣九江蔣幹往見瑜。幹有儀容,以才辯見稱,獨步江、淮之閒,莫與為對。乃布衣葛巾,自託私行詣瑜。瑜出迎之,立謂幹曰:「子翼良苦,遠涉江湖為曹氏作說客邪?」幹曰:「吾與足下州里,中閒別隔,遙聞芳烈,故來叙闊,并觀雅規,而云說客,無乃逆詐乎?」瑜曰:「吾雖不及夔、曠,聞弦賞音,足知雅曲也。」因延幹入,為設酒食。畢,遣之曰:「適吾有密事,且出就館,事了,別自相請。」後三日,瑜請幹與周觀營中,行視倉庫軍資器仗訖,還宴飲,示之侍者服飾珍玩之物,因謂幹曰:「丈夫處世,遇知己之主,外託君臣之義,內結骨肉之恩,言行計從,禍福共之,假使蘇張更生,酈叟復出,猶撫其背而折其辭,豈足下幼生所能移乎?」幹但笑,終無所言。幹還,稱瑜雅量高致,非言辭所間。中州之士,亦以此多之。劉備之自京還也,權乘飛雲大船,與張昭、秦松、魯肅等十餘人共追送之,大宴會敘別。昭、肅等先出,權獨與備留語,因言次,歎瑜曰:「公瑾文武籌略,萬人之英,顧其器量廣大,恐不乆為人臣耳。」瑜之破魏軍也,曹公曰:「孤不羞走。」後書與權曰:「赤壁之役,值有疾病,孤燒船自退,橫使周瑜虛獲此名。」瑜威聲遠著,故曹公、劉備咸欲疑譖之。及卒,權流涕曰:「公瑾有王佐之資,今忽短命,孤何賴哉!」後權稱尊號,謂公卿曰:「孤非周公瑾,不帝矣。」

10 瑜少精意於音樂,雖三爵之後,其有闕誤,瑜必知之,知之必顧,故時人謠曰:「曲有誤,周郎顧。」

11 瑜兩男一女。女配太子登。男循尚公主,拜騎都尉,有瑜風,早卒。循弟胤,初拜興業都尉,妻以宗女,授兵千人,屯公安。黃龍元年,封都鄉侯,後以罪徙廬陵郡。赤烏二年,諸葛瑾、步騭連名上疏曰:「故將軍周瑜子胤,昔蒙粉飾,受封為將,不能養之以福,思立功效,至縱情欲,招速罪辟。臣竊以瑜昔見寵任,入作心膂,出為爪牙,銜命出征,身當矢石,盡節用命,視死如歸,故能摧曹操於烏林,走曹仁於郢都,揚國威德,華夏是震,蠢爾蠻荊,莫不賔服,雖周之方叔,漢之信、布,誠無以尚也。夫折衝扞難之臣,自古帝王莫不貴重,故漢高帝封爵之誓曰『使黃河如帶,太山如礪,國以永存,爰及苗裔』;申以丹書,重以盟詛,藏于宗廟,傳於無窮,欲使功臣之後,世世相踵,非徒子孫,乃關苗裔,報德明功,勤勤懇懇,如此之至,欲以勸戒後人,用命之臣,死而無悔也。況於瑜身沒未乆,而其子胤降為匹夫,益可悼傷。竊惟陛下欽明稽古,隆於興繼,為胤歸訴,乞匄餘罪,還兵復爵,使失旦之雞,復得一鳴,抱罪之臣,展其後效。」權荅曰:「腹心舊勳,與孤協事,公瑾有之,誠所不忘。昔胤年少,初無功勞,橫受精兵,爵以侯將,蓋念公瑾以及於胤也。而胤恃此,酗淫自恣,前後告喻,曾無悛改。孤於公瑾,義猶二君,樂胤成就,豈有已哉?迫胤罪惡,未宜便還,且欲苦之,使自知耳。今二君勤勤援引漢高河山之誓,孤用恧然。雖德非其疇,猶欲庶幾,事亦如爾,故未順旨。以公瑾之子,而二君在中間,苟使能改,亦何患乎!」瑾、隲表比上,朱然及全琮亦俱陳乞,權乃許之。會胤病死。

12 瑜兄子峻,亦以瑜元功為偏將軍,領吏士千人。峻卒,全琮表峻子護為將。權曰:「昔走曹操,拓有荊州,皆是公瑾,常不忘之。初聞峻亡,仍欲用護,聞護性行危險,用之適為作禍,故便止之。孤念公瑾,豈有已乎?」

《魯肅傳》

1 魯肅字子敬,臨淮東城人也。生而失父,與祖母居。家富於財,性好施與。爾時天下已亂,肅不治家事,大散財貨,摽賣田地,以賑窮弊結士為務,甚得鄉邑歡心。

2 周瑜為居巢長,將數百人故過候肅,并求資糧。肅家有兩囷米,各三千斛,肅乃指一囷與周瑜,瑜益知其奇也,遂相親結,定僑、札之分。袁術聞其名,就署東城長。肅見術無綱紀,不足與立事,乃攜老弱將輕俠少年百餘人,南到居巢就瑜。瑜之東渡,因與同行,

3 吳書曰:肅體貌魁奇,少有壯節,好為奇計。天下將亂,乃學擊劒騎射,招聚少年,給其衣食,往來南山中射獵,陰相部勒,講武習兵。父老咸曰:「魯氏世衰,乃生此狂兒!」後雄傑並起,中州擾亂,肅乃命其屬曰:「中國失綱,寇賊橫暴,淮、泗間非遺種之地,吾聞江東沃野萬里,民富兵彊,可以避害,寧肯相隨俱至樂土,以觀時變乎?」其屬皆從命。乃使細弱在前,彊壯在後,男女三百餘人行。州追騎至,肅等徐行,勒兵持滿,謂之曰:「卿等丈夫,當解大數。今日天下兵亂,有功弗賞,不追無罰,何為相偪乎?」又自植盾,引弓射之,矢皆洞貫。騎旣嘉肅言,且度不能制,乃相率還。肅渡江往見策,策亦雅奇之。留家曲阿。會祖母亡,還葬東城。

4 劉子揚與肅友善,遺肅書曰:「方今天下豪傑並起,吾子姿才,尤宜今日。急還迎老母,無事滯於東城。近鄭寶者,今在巢湖,擁衆萬餘,處地肥饒,廬江閒人多依就之,況吾徒乎?觀其形勢,又可博集,時不可失,足下速之。」肅荅然其計。葬畢還曲阿,欲北行。會瑜已徙肅母到吳,肅具以狀語瑜。時孫策已薨,權尚住吳,瑜謂肅曰:「昔馬援荅光武云『當今之世,非但君擇臣,臣亦擇君』。今主人親賢貴士,納奇錄異,且吾聞先哲祕論,承運代劉氏者,必興於東南,推步事勢,當其歷數。終搆帝基,以協天符,是烈士攀龍附鳳馳騖之秋。吾方達此,足下不須以子揚之言介意也。」肅從其言。瑜因薦肅才宜佐時,當廣求其比,以成功業,不可令去也。

5 權即見肅,與語甚恱之。衆賔罷退,肅亦辭出,乃獨引肅還,合榻對飲。因密議曰:「今漢室傾危,四方雲擾,孤承父兄遺業,思有桓文之功。君旣惠顧,何以佐之?」肅對曰:「昔高帝區區欲尊事義帝而不獲者,以項羽為害也。今之曹操,猶昔項羽,將軍何由得為桓文乎?肅竊料之,漢室不可復興,曹操不可卒除。為將軍計,惟有鼎足江東,以觀天下之釁。規模如此,亦自無嫌。何者?北方誠多務也。因其多務,勦除黃祖,進伐劉表,竟長江所極,據而有之,然後建號帝王以圖天下,此高帝之業也。」權曰:「今盡力一方,兾以輔漢耳,此言非所及也。」張昭非肅謙下不足,頗訾毀之,云肅年少麤踈,未可用。權不以介意,益貴重之,賜肅母衣服幃帳,居處雜物,富擬其舊。

6 劉表死。肅進說曰:「夫荊楚與國鄰接,水流順北,外帶江漢,內阻山陵,有金城之固,沃野萬里,士民殷富,若據而有之,此帝王之資也。今表新亡,二子素不輯睦,軍中諸將,各有彼此。加劉備天下梟雄,與操有隙,寄寓於表,表惡其能而不能用也。若備與彼協心,上下齊同,則宜撫安,與結盟好;如有離違,宜別圖之,以濟大事。肅請得奉命弔表二子,并慰勞其軍中用事者,及說備使撫表衆,同心一意,共治曹操,備必喜而從命。如其克諧,天下可定也。今不速往,恐為操所先。」權即遣肅行。到夏口,聞曹公已向荊州,晨夜兼道。比至南郡,而表子琮已降曹公,備惶遽奔走,欲南渡江。肅徑迎之,到當陽長阪,與備會,宣騰權旨,及陳江東彊固,勸備與權併力。備甚歡恱。時諸葛亮與備相隨,肅謂亮曰「我子瑜友也」,即共定交。備遂到夏口,遣亮使權,肅亦反命。臣松之案:劉備與權併力,共拒中國,皆肅之本謀。又語諸葛亮曰「我子瑜友也」,則亮已亟聞肅言矣。而蜀書亮傳云:「亮以連橫之略說權,權乃大喜。」如似此計始出於亮。若二國史官,各記所聞,競欲稱揚本國容美,各取其功。今此二書,同出一人,而舛互若此,非載述之體也。

7 會權得曹公欲東之問,與諸將議,皆勸權迎之,而肅獨不言。權起更衣,肅追於宇下,權知其意,執肅手曰:「卿欲何言?」肅對曰:「向察衆人之議,專欲誤將軍,不足與圖大事。今肅可迎操耳,如將軍,不可也。何以言之?今肅迎操,操當以肅還付鄉黨,品其名位,猶不失下曹從事,乘犢車,從吏卒,交游士林,累官故不失州郡也。將軍迎操,將安所歸?願早定大計,莫用衆人之議也。」權歎息曰:「此諸人持議,甚失孤望;今卿廓開大計,正與孤同,此天以卿賜我也。」魏書及九州春秋曰:曹公征荊州,孫權大懼,魯肅實欲勸權拒曹公,乃激說權曰:「彼曹公者,實嚴敵也,新并袁紹,兵馬甚精,乘戰勝之威,伐喪亂之國,克可必也。不如遣兵助之,且送將軍家詣鄴;不然,將危。」權大怒,欲斬肅,肅因曰:「今事已急,即有他圖,何不遣兵助劉備,而欲斬我乎?」權然之,乃遣周瑜助備。孫盛曰:吳書及江表傳,魯肅一見孫權便說拒曹公而論帝王之略,劉表之死也,又請使觀變,無緣方復激說勸迎曹公也。又是時勸迎者衆,而云獨欲斬肅,非其論也。

8 時周瑜受使至鄱陽,肅勸追召瑜還。遂任瑜以行事,以肅為贊軍校尉,助畫方略。曹公破走,肅即先還,權大請諸將迎肅。肅將入閤拜,權起禮之,因謂曰:「子敬,孤持鞌下馬相迎,足以顯卿未?」肅趨進曰:「未也。」衆人聞之,無不愕然。就坐,徐舉鞭言曰:「願至尊威德加乎四海,總括九州,克成帝業,更以安車軟輪徵肅,始當顯耳。」權撫掌歡笑。

9 後備詣京見權,求都督荊州,惟肅勸權借之,共拒曹公。漢晉春秋曰:呂範勸留備,肅曰:「不可。將軍雖神武命世,然曹公威力實重,初臨荊州,恩信未洽,宜以借備,使撫安之。多操之敵,而自為樹黨,計之上也。」權即從之。曹公聞權以土地業備,方作書,落筆於地。

10 周瑜病困,上疏曰:「當今天下,方有事役,是瑜乃心夙夜所憂,願至尊先慮未然,然後康樂。今旣與曹操為敵,劉備近在公安,邊境密邇,百姓未附,宜得良將以鎮撫之。魯肅智略足任,乞以代瑜。瑜隕踣之日,所懷盡矣。」江表傳載:初瑜疾困,與權牋曰:「瑜以凡才,昔受討逆殊特之遇,委以腹心,遂荷榮任,統御兵馬,志執鞭弭,自效戎行。規定巴蜀,次取襄陽,憑賴威靈,謂若在握。至以不謹,道遇暴疾,昨自醫療,日加無損。人生有死,脩短命矣,誠不足惜,但恨微志未展,不復奉教命耳。方今曹公在北,疆埸未靜,劉備寄寓,有似養虎,天下之事,未知終始,此朝士旰食之秋,至尊垂慮之日也。魯肅忠烈,臨事不苟,可以代瑜。人之將死,其言也善,儻或可採,瑜死不朽矣。」案此牋與本傳所載,意旨雖同,其辭乖異耳。即拜肅奮武校尉,代瑜領兵。瑜士衆四千餘人,奉邑四縣,皆屬焉。令程普領南郡太守。肅初住江陵,後下屯陸口,威恩大行,衆增萬餘人,拜漢昌太守、偏將軍。十九年,從權破皖城,轉橫江將軍。

11 先是,益州牧劉璋綱維頹弛,周瑜、甘寧並勸權取蜀,權以咨備,備內欲自規,乃偽報曰:「備與璋託為宗室,兾憑英靈,以匡漢朝。今璋得罪左右,備獨竦懼,非所敢聞,願加寬貸。若不獲請,備當放髮歸於山林。」後備西圖璋,留關羽守,權曰:「猾虜乃敢挾詐!」及羽與肅鄰界,數生狐疑,疆埸紛錯,肅常以歡好撫之。備旣定益州,權求長沙、零、桂,備不承旨,權遣呂蒙率衆進取。備聞,自還公安,遣羽爭三郡。肅住益陽,與羽相拒。肅邀羽相見,各駐兵馬百步上,但請將軍單刀俱會。肅因責數羽曰:「國家區區本以土地借卿家者,卿家軍敗遠來,無以為資故也。今已得益州,旣無奉還之意,但求三郡,又不從命。」語未究竟,坐有一人曰:「夫土地者,惟德所在耳,何常之有!」肅厲聲呵之,辭色甚切。羽操刀起謂曰:「此自國家事,是人何知!」目使之去。吳書曰:肅欲與羽會語,諸將疑恐有變,議不可往。肅曰:「今日之事,宜相開譬。劉備負國,是非未決,羽亦何敢重欲干命!」乃自就羽。羽曰:「烏林之役,左將軍身在行間,寢不脫介,自力破魏,豈得徒勞,無一塊壤,而足下來欲收地邪?」肅曰:「不然。始與豫州觀於長阪,豫州之衆不當一校,計窮慮極,志勢摧弱,圖欲遠竄,望不及此。主上矜愍豫州之身無有處所,不愛土地士人之力,使有所庇廕以濟其患,而豫州私獨飾情,愆德隳好。今已藉手於西州矣,又欲翦并荊州之土,斯蓋凡夫所不忍行,而況整領人物之主乎!肅聞貪而棄義,必為禍階。吾子屬當重任,曾不能明道處分,以義輔時,而負恃弱衆以圖力爭,師曲為老,將何獲濟?」羽無以荅。備遂割湘水為界,於是罷軍。

12 肅年四十六,建安二十二年卒。權為舉哀,又臨其葬。諸葛亮亦為發哀。吳書曰:肅為人方嚴,寡於玩飾,內外節儉,不務俗好。治軍整頓,禁令必行,雖在軍陣,手不釋卷。又善談論,能屬文辭,思度弘遠,有過人之明。周瑜之後,肅為之冠。權稱尊號,臨壇,顧謂公卿曰:「昔魯子敬甞道此,可謂明於事勢矣。

13 肅遺腹子淑旣壯,濡須督張承謂終當到至。永安中,為昭武將軍、都亭侯、武昌督。建衡中,假節,遷夏口督。所在嚴整,有方幹。鳳皇三年卒。子睦襲爵,領兵馬。

《呂蒙傳》

1 呂蒙字子明,汝南富陂人也。少南渡,依姊夫鄧當。當為孫策將,數討山越。蒙年十五六,竊隨當擊賊,當顧見大驚,呵叱不能禁止。歸以告蒙母,母恚欲罰之,蒙曰:「貧賤難可居,脫誤有功,富貴可致。且不探虎穴,安得虎子?」母哀而舍之。時當職吏以蒙年小輕之,曰:「彼豎子何能為?此欲以肉餧虎耳。」他日與蒙會,又蚩辱之。蒙大怒,引刀殺吏,出走,逃邑子鄭長家。出因校尉袁雄自首,承間為言,策召見奇之,引置左右。

2 數歲,鄧當死,張昭薦蒙代當,拜別部司馬。權統事,料諸小將兵少而用薄者,欲并合之。蒙陰賒貰,為兵作絳衣行縢,及簡日,陳列赫然,兵人練習,權見之大恱,增其兵。從討丹楊,所向有功,拜平北都尉,領廣德長。

3 從征黃祖,祖令都督陳就逆以水軍出戰。蒙勒前鋒,親梟就首,將士乘勝,進攻其城。祖聞就死,委城走,兵追禽之。權曰:「事之克,由陳就先獲也。」以蒙為橫野中郎將,賜錢千萬。

4 是歲,又與周瑜、程普等西破曹公於烏林,圍曹仁於南郡。益州將襲肅舉軍來附,瑜表以肅兵益蒙,蒙盛稱肅有膽用,且慕化遠來,於義宜益不宜奪也。權善其言,還肅兵。瑜使甘寧前據夷陵,曹仁分衆攻寧,寧困急,使使請救。諸將以兵少不足分,蒙謂瑜、普曰:「留淩公績,蒙與君行,解圍釋急,勢亦不乆,蒙保公績能十日守也。」又說瑜分遣三百人柴斷險道,賊走可得其馬。瑜從之。軍到夷陵,即日交戰,所殺過半。敵夜遁去,行遇柴道,騎皆舍馬步走。兵追蹙擊,獲馬三百匹,方船載還。於是將士形勢自倍,乃渡江立屯,與相攻擊,曹仁退走,遂據南郡,撫定荊州。還,拜偏將軍,領尋陽令。

5 魯肅代周瑜,當之陸口,過蒙屯下。肅意尚輕蒙,或說肅曰:「呂將軍功名日顯,不可以故意待也,君宜顧之。」遂往詣蒙。酒酣,蒙問肅曰:「君受重任,與關羽為鄰,將何計略,以備不虞?」肅造次應曰:「臨時施宜。」蒙曰:「今東西雖為一家,而關羽實熊虎也,計安可不豫定?」因為肅畫五策。肅於是越席就之,拊其背曰:「呂子明,吾不知卿才略所及乃至於此也。」遂拜蒙母,結友而別。

6 江表傳曰:初,權謂蒙及蔣欽曰:「卿今並當塗掌事,宜學問以自開益。」蒙曰:「在軍中常苦多務,恐不容復讀書。」權曰:「孤豈欲卿治經為博士邪?但當令涉獵見往事耳。卿言多務孰若孤,孤少時歷詩、書、禮記、左傳、國語,惟不讀易。至統事以來,省三史、諸家兵書,自以為大有所益。如卿二人,意性朗悟,學必得之,寧當不為乎?宜急讀孫子、六韜、左傳、國語及三史。孔子言『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無益,不如學也』。光武當兵馬之務,手不釋卷。孟德亦自謂老而好學。卿何獨不自勉勗邪?」蒙始就學,篤志不倦,其所覽見,舊儒不勝。後魯肅上代周瑜,過蒙言議,常欲受屈。肅拊蒙背曰:「吾謂大弟但有武略耳,至於今者,學識英博,非復吳下阿蒙。」蒙曰:「士別三日,即更刮目相待。大兄今論,何一稱穰侯乎。兄今代公瑾,旣難為繼,且與關羽為鄰。斯人長而好學,讀左傳略皆上口,梗亮有雄氣,然性頗自負,好陵人。今與為對,當有單複以鄉待之。」。密為肅陳三策,肅敬受之,祕而不宣。權常歎曰:「人長而進益,如呂蒙、蔣欽,蓋不可及也。富貴榮顯,更能折節好學,耽恱書傳,輕財尚義,所行可迹,並作國士,不亦休乎!」

7 時蒙與成當、宋定、徐顧屯次比近,三將死,子弟幼弱,權悉以兵并蒙。蒙固辭,陳啟顧等皆勤勞國事,子弟雖小,不可廢也。書三上,權乃聽。蒙於是又為擇師,使輔導之,其操心率如此。

8 魏使廬江謝奇為蘄春典農,屯皖田鄉,數為邊寇。蒙使人誘之,不從,則伺隙襲擊,奇遂縮退,其部伍孫子才、宋豪等,皆攜負老弱,詣蒙降。後從權拒曹公於濡須,數進奇計,又勸權夾水口立塢,所以備御甚精,吳錄曰:權欲作塢,諸將皆曰:「上岸擊賊,洗足入船,何用塢為?」呂蒙曰:「兵有利鈍,戰無百勝,如有邂逅,敵步騎蹙人,不暇及水,其得入船乎?」權曰:「善。」遂作之。曹公不能下而退。

9 曹公遣朱光為廬江太守,屯皖,大開稻田,又令間人招誘鄱陽賊帥,使作內應。蒙曰:「皖田肥美,若一收孰,彼衆必增,如是數歲,操態見矣,宜早除之。」乃具陳其狀。於是權親征皖,引見諸將,問以計策。吳書曰:諸將皆勸作土山,添攻具,蒙趨進曰:「治攻具及土山,必歷日乃成,城備旣脩,外救必至,不可圖也。且乘雨水以入,若留經日,水必向盡,還道艱難,蒙竊危之。今觀此城,不能甚固,以三軍銳氣,四面並攻,不移時可拔,及水以歸,全勝之道也。」權從之。蒙乃薦甘寧為升城督,督攻在前,蒙以精銳繼之。侵晨進攻,蒙手執枹鼓,士卒皆騰踊自升,食時破之。旣而張遼至夾石,聞城已拔,乃退。權嘉其功,即拜廬江太守,所得人馬皆分與之,別賜尋陽屯田六百戶,官屬三十人。蒙還尋陽,未期而廬陵賊起,諸將討擊不能禽,權曰:「鷙鳥累百,不如一鶚。」復令蒙討之。蒙至,誅其首惡,餘皆釋放,復為平民。

10 是時劉備令關羽鎮守,專有荊土,權命蒙西取長沙、零、桂三郡。蒙移書二郡,望風歸服,惟零陵太守郝普城守不降。而備自蜀親至公安,遣羽爭三郡。權時住陸口,使魯肅將萬人屯益陽拒羽,而飛書召蒙,使捨零陵,急還助肅。初,蒙旣定長沙,當之零陵,過酃,載南陽鄧玄之,玄之者郝普之舊也,欲令誘普。及被書當還,蒙祕之,夜召諸將,授以方略,晨當攻城,顧謂玄之曰:「郝子太聞世間有忠義事,亦欲為之,而不知時也。左將軍在漢中,為夏侯淵所圍。關羽在南郡,今至尊身自臨之。近者破樊本屯,救酃,逆為孫規所破。此皆目前之事,君所親見也。彼方首尾倒縣,救死不給,豈有餘力復營此哉?今吾士卒精銳,人思致命,至尊遣兵,相繼於道。今予以旦夕之命,待不可望之救,猶牛蹄中魚,兾賴江漢,其不可恃亦明矣。若子太必能一士卒之心,保孤城之守,尚能稽延旦夕,以待所歸者,可也。今吾計力度慮,而以攻此,曾不移日,而城必破,城破之後,身死何益於事,而令百歲老母戴白受誅,豈不痛哉?度此家不得外問,謂援可恃,故至於此耳。君可見之,為陳禍福。」玄之見普,具宣蒙意,普懼而聽之。玄之先出報蒙,普尋後當至。蒙豫勑四將,各選百人,普出,便入守城門。須臾普出,蒙迎執其手,與俱下船。語畢,出書示之,因拊手大笑,普見書,知備在公安,而羽在益陽,慙恨入地。蒙留孫河委以後事。即日引軍赴益陽。劉備請盟,權乃歸普等,割湘水,以零陵還之。以尋陽、陽新為蒙奉邑。

11 師還,遂征合肥,旣徹兵,為張遼等所襲,蒙與淩統以死扞衞。後曹公又大出濡須,權以蒙為督,據前所立塢,置彊弩萬張於其上,以拒曹公。曹公前鋒屯未就,蒙攻破之,曹公引退。拜蒙左護軍、虎威將軍。

12 魯肅卒,蒙西屯陸口,肅軍人馬萬餘盡以屬蒙。又拜漢昌太守,食下雋、劉陽、漢昌、州陵。與關羽分土接境,知羽驍雄,有并兼心,且居國上流,其勢難乆。初,魯肅等以為曹公尚存,禍難始搆,宜相輔協,與之同仇,不可失也,蒙乃密陳計策曰:「令征虜守南郡,潘璋住白帝,蔣欽將游兵萬人,循江上下,應敵所在,蒙為國家前據襄陽,如此,何憂於操,何賴於羽?且羽君臣,矜其詐力,所在反覆,不可以腹心待也。今羽所以未便東向者,以至尊聖明,蒙等尚存也。今不於彊壯時圖之,一旦僵仆,欲復陳力,其可得邪?」權深納其策,又聊復與論取徐州意,蒙對曰:「今操遠在河北,新破諸袁,撫集幽、兾,未暇東顧。徐土守兵,聞不足言,往自可克。然地勢陸通,驍騎所騁,至尊今日得徐州,操後旬必來爭,雖以七八萬人守之,猶當懷憂。不如取羽,全據長江,形勢益張。」權尤以此言為當。及蒙代肅,初至陸口,外倍脩恩厚,與羽結好。

13 後羽討樊,留兵將備公安、南郡。蒙上疏曰:「羽討樊而多留備兵,必恐蒙圖其後故也。蒙常有病,乞分士衆還建業,以治疾為名。羽聞之,必撤備兵,盡赴襄陽。大軍浮江,晝夜馳上,襲其空虛,則南郡可下,而羽可禽也。」遂稱病篤,權乃露檄召蒙還,陰與圖計。羽果信之,稍撤兵以赴樊。魏使于禁救樊,羽盡禽禁等,人馬數萬,託以糧乏,擅取湘關米。權聞之,遂行,先遣蒙在前。蒙至尋陽,盡伏其精兵𦩷𦪇中,使白衣搖櫓,作商賈人服,晝夜兼行,至羽所置江邊屯候,盡收縛之,是故羽不聞知。遂到南郡,士仁、麋芳皆降。吳書曰:將軍士仁在公安拒守,蒙令虞翻說之。翻至城門,謂守者曰:「吾欲與汝將軍語。」仁不肯相見。乃為書曰:「明者防禍於未萌,智者圖患於將來,知得知失,可與為人,知存知亡,足別吉凶。大軍之行,斥候不及施,烽火不及舉,此非天命,必有內應。將軍不先見時,時至又不應之,獨守縈帶之城而不降,死戰則毀宗滅祀,為天下譏笑。呂虎威欲徑到南郡,斷絕陸道,生路一塞,案其地形,將軍為在箕舌上耳,奔走不得免,降則失義,竊為將軍不安,幸孰思焉。」仁得書,流涕而降。翻謂蒙曰:「此譎兵也,當將仁行,留兵備城。」遂將仁至南郡。南郡太守麋芳城守,蒙以仁示之,遂降。吳錄曰:初,南郡城中失火,頗焚燒軍器。羽以責芳,芳內畏懼,權聞而誘之,芳潛相和。及蒙攻之,乃以牛酒出降。蒙入據城,盡得羽及將士家屬,皆撫慰,約令軍中不得干歷人家,有所求取。蒙麾下士,是汝南人,取民家一笠,以覆官鎧,官鎧雖公,蒙猶以為犯軍令,不可以鄉里故而廢法,遂垂涕斬之。於是軍中震慄,道不拾遺。蒙旦暮使親近存恤耆老,問所不足,疾病者給醫藥,饑寒者賜衣糧。羽府藏財寶,皆封閉以待權至。羽還,在道路,數使人與蒙相聞,蒙輒厚遇其使,周游城中,家家致問,或手書示信。羽人還,私相參訊,咸知家門無恙,見待過於平時,故羽吏士無鬬心。會權尋至,羽自知孤窮,乃走麥城,西至漳鄉,衆皆委羽而降。權使朱然、潘璋斷其徑路,即父子俱獲,荊州遂定。

14 以蒙為南郡太守,封孱陵侯,江表傳曰:權於公安大會,呂蒙以疾辭,權笑曰:「禽羽之功,子明謀也,今大功已捷,慶賞未行,豈邑邑邪?」乃增給步騎鼓吹,勑選虎威將軍官屬,并南郡、廬江二郡威儀。拜畢還營,兵馬導從,前後鼓吹,光耀于路。賜錢一億,黃金五百斤。蒙固辭金錢,權不許。封爵未下,會蒙疾發,權時在公安,迎置內殿,所以治護者萬方,募封內有能愈蒙疾者,賜千金。時有鍼加,權為之慘慼,欲數見其顏色,又恐勞動,常穿壁瞻之,見小能下食則喜,顧左右言笑,不然則咄唶,夜不能寐。病中瘳,為下赦令,羣臣畢賀。後更增篤,權自臨視,命道士於星辰下為之請命。年四十二,遂卒於內殿。時權哀痛甚,為之降損。蒙未死時,所得金寶諸賜盡付府藏,勑主者命絕之日皆上還,喪事務約。權聞之,益以悲感。

15 蒙少不脩書傳,每陳大事,常口占為牋疏。常以部曲事為江夏太守蔡遺所白,蒙無恨意。及豫章太守顧邵卒,權問所用,蒙因薦遺奉職佳吏,權笑曰:「君欲為祁奚耶?」於是用之。甘寧麤暴好殺,旣常失蒙意,又時違權令,權怒之,蒙輒陳請:「天下未定,鬬將如寧難得,宜容忍之。」權遂厚寧,卒得其用。

16 蒙子霸襲爵,與守冢三百家,復田五十頃。霸卒,兄琮襲侯。琮卒,弟睦嗣。

17 孫權與陸遜論周瑜、魯肅及蒙曰:「公瑾雄烈,膽略兼人,遂破孟德,開拓荊州,邈焉難繼,君今繼之。公瑾昔要子敬來東,致達於孤,孤與宴語,便及大略帝王之業,此一快也。後孟德因獲劉琮之勢,張言方率數十萬衆水步俱下。孤普請諸將,咨問所宜,無適先對,至子布、文表,俱言宜遣使脩檄迎之,子敬即駮言不可,勸孤急呼公瑾,付任以衆,逆而擊之,此二快也。且其決計策,意出張蘇遠矣;後雖勸吾借玄德地,是其一短,不足以損其二長也。周公不求備於一人,故孤忘其短而貴其長,常以比方鄧禹也。又子明少時,孤謂不辭劇易,果敢有膽而已;及身長大,學問開益,籌略奇至,可以次於公瑾,但言議英發不及之耳。圖取關羽,勝於子敬。子敬荅孤書云:『帝王之起,皆有驅除,羽不足忌。』此子敬內不能辨,外為大言耳,孤亦恕之,不苟責也。然其作軍,屯營不失,令行禁止,部界無廢負,路無拾遺,其法亦美也。」

18 評曰:曹公乘漢相之資,挾天子而掃羣桀,新盪荊城,仗威東夏,于時議者莫不疑貳。周瑜、魯肅建獨斷之明,出衆人之表,實奇才也。呂蒙勇而有謀斷,識軍計,譎郝普,禽關羽,最其妙者。初雖輕果妄殺,終於克己,有國士之量,豈徒武將而已乎!孫權之論,優劣允當,故載錄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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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瑜傳》

周瑜

公瑾,廬江舒人也。從祖父景,景子忠,皆為漢太尉。
謝承後漢書曰:景字仲嚮,少以廉能見稱,以明學察孝廉,辟公府。後為豫州刺史,辟汝南陳蕃為別駕,潁川李膺、荀緄、杜密、沛國朱㝢為從事,皆天下英俊之士也。稍遷至尚書令,遂登太尉。張璠漢紀曰:景父榮,章、和世為尚書令。初景歷位牧守,好善愛士,每歲舉孝廉,延請入,上後堂,與家人宴會,如此者數四。及贈送旣備,又選用其子弟,常稱曰:「移臣作子,於之何有?」先是,司徒韓縯為河內太守,在公無私,所舉一辭而已,後亦不及其門戶,曰:「我舉若可矣,不令恩偏稱一家也。」當時論者,或兩譏焉。父異,洛陽令。
瑜長壯有姿貌。初,孫堅興義兵討董卓,徙家於舒。堅子策與瑜同年,獨相友善,瑜推道南大宅以舍策,升堂拜母,有無通共。瑜從父尚為丹楊太守,瑜往省之。會策將東渡,到歷陽,馳書報瑜,瑜將兵迎策。策大喜曰:「吾得卿,諧也。」遂從攻橫江、當利,皆拔之。乃渡擊秣陵,破笮融、薛禮,轉下湖孰、江乘,進入曲阿,劉繇奔走,而策之衆已數萬矣。因謂瑜曰:「吾以此衆取吳會平山越已足。卿還鎮丹楊。」瑜還。頃之,袁術遣從弟胤代尚為太守,而瑜與尚俱還壽春。術欲以瑜為將,瑜觀術終無所成,故求為居巢長,欲假塗東歸,術聽之。遂自居巢還吳。是歲,建安三年也。策親自迎瑜,授建威中郎將,即與兵二千人,騎五十匹。江表傳曰:策又給瑜鼓吹,為治館舍,贈賜莫與為比。策令曰:「周公瑾英雋異才,與孤有總角之好,骨肉之分。如前在丹楊,發衆及船糧以濟大事,論德酬功,此未足以報者也。」瑜時年二十四,吳中皆呼為周郎。以瑜恩信著於廬江,出備牛渚,後領春穀長。頃之,策欲取荊州,以瑜為中護軍,領江夏太守,從攻皖,拔之。時得橋公兩女,皆國色也。策自納大橋,瑜納小橋。江表傳曰:策從容戲瑜曰:「橋公二女雖流離,得吾二人作壻,亦足為歡。」復進尋陽,破劉勳,討江夏,還定豫章、廬陵,留鎮巴丘。臣松之案:孫策于時始得豫章、廬陵,尚未能得定江夏。瑜之所鎮,應在今巴丘縣也,與後所平巴丘處不同。
五年,策薨,權統事。瑜將兵赴喪,遂留吳,以中護軍與長史張昭共掌衆事。江表傳曰:曹公新破袁紹,兵威日盛,建安七年,下書責權質任子。權召羣臣會議,張昭、秦松等猶豫不能決,權意不欲遣質,乃獨將瑜詣母前定議,瑜曰:「昔楚國初封於荊山之側,不滿百里之地,繼嗣賢能,廣土開境,立基於郢,遂據荊揚,至於南海,傳業延祚,九百餘年。今將軍承父兄餘資,六郡之衆,兵精糧多,將士用命,鑄山為銅,煑海為鹽,境內富饒,人不思亂,汎舟舉帆,朝發夕到,士風勁勇,所向無敵,有何偪迫,而欲送質?質一入,不得不與曹氏相首尾,與相首尾,則命召不得不往,便見制於人也。極不過一侯印,僕從十餘人,車數乘,馬數匹,豈與南靣稱孤同哉?不如勿遣,徐觀其變。若曹氏能率義以正天下,將軍事之未晚。若圖為暴,亂兵猶火也,不戢將自焚。將軍韜勇抗威,以待天命,何送質之有!」權母曰:「公瑾議是也。公瑾與伯符同年,小一月耳,我視之如子也,汝其兄事之。」遂不送質。十一年,督孫瑜等討麻、保二屯,梟其渠帥,囚俘萬餘口,還備官亭。江夏太守黃祖遣將鄧龍將兵數千人入柴桑,瑜追討擊,生虜龍送吳。
十三年春,權討江夏,瑜為前部大督。其年九月,曹公入荊州,劉琮舉衆降,曹公得其水軍,船步兵數十萬,將士聞之皆恐。權延見羣下,問以計策。議者咸曰:「曹公豺虎也,然託名漢相,挾天子以征四方,動以朝廷為辭,今日拒之,事更不順。且將軍大勢,可以拒操者,長江也。今操得荊州,掩有其地,劉表治水軍,蒙衝鬬艦,乃以千數,操悉浮以沿江,兼有步兵,水陸俱下,此為長江之險,已與我共之矣。而勢力衆寡,又不可論。愚謂大計不如迎之。」瑜曰:「不然。操雖託名漢相,其實漢賊也。將軍以神武雄才,兼仗父兄之烈,割據江東,地方數千里,兵精足用,英雄樂業,尚當橫行天下,為漢家除殘去穢。況操自送死,而可迎之邪?請為將軍籌之:今使北土已安,操無內憂,能曠日持乆來爭疆場,又能與我校勝負於船楫可乎?今北土旣未平安,加馬超、韓遂尚在關西,為操後患。且舍鞌馬,杖舟楫,與吳越爭衡,本非中國所長。又今盛寒,馬無槀草,驅中國士衆遠涉江湖之閒,不習水土,必生疾病。此數四者,用兵之患也,而操皆冒行之。將軍禽操,宜在今日。瑜請得精兵三萬人,進住夏口,保為將軍破之。」權曰:「老賊欲廢漢自立乆矣,徒忌二袁、呂布、劉表與孤耳。今數雄已滅,惟孤尚存,孤與老賊,勢不兩立。君言當擊,甚與孤合,此天以君授孤也。」江表傳曰:權拔刀斫前奏案曰:「諸將吏敢復有言當迎操者,與此案同!」及會罷之夜,瑜請見曰:「諸人徒見操書,言水步八十萬,而各恐懾,不復料其虛實,便開此議,甚無謂也。今以實校之,彼所將中國人,不過十五六萬,且軍已久疲,所得表衆,亦極七八萬耳,尚懷狐疑。夫以疲病之卒,御狐疑之衆,衆數雖多,甚未足畏。得精兵五萬,自足制之,願將軍勿慮。」權撫背曰:「公瑾,卿言至此,甚合孤心。子布、元表諸人,各顧妻子,挾持私慮,深失所望,獨卿與子敬與孤同耳,此天以卿二人贊孤也。五萬兵難卒合,已選三萬人,船糧戰具俱辦,卿與子敬、程公便在前發,孤當續發人衆,多載資糧,為卿後援。卿能辦之者誠決,邂逅不如意,便還就孤,孤當與孟德決之。」臣松之以為建計拒曹公,實始魯肅。于時周瑜使鄱陽,肅勸權呼瑜,瑜使鄱陽還,但與肅闇同,故能共成大勳。本傳直云,權延見羣下,問以計策,瑜擺衆人之議,獨言抗拒之計,了不云肅先有謀,殆為攘肅之善也。
時劉備為曹公所破,欲引南渡江,與魯肅遇於當陽,遂共圖計,因進住夏口,遣諸葛亮詣權,權遂遣瑜及程普等與備并力逆曹公,遇於赤壁。時曹公軍衆已有疾病,初一交戰,公軍敗退,引次江北。瑜等在南岸。瑜部將黃蓋曰:「今寇衆我寡,難與持乆。然觀操軍船艦首尾相接,可燒而走也。」乃取蒙衝鬬艦數十艘,實以薪草,膏油灌其中,裹以帷幕,上建牙旗,先書報曹公,欺以欲降。江表傳載蓋書曰:「蓋受孫氏厚恩,常為將帥,見遇不薄。然顧天下事有大勢,用江東六郡山越之人,以當中國百萬之衆,衆寡不敵,海內所共見也。東方將吏,無有愚智,皆知其不可,惟周瑜、魯肅偏懷淺戇,意未解耳。今日歸命,是其實計。瑜所督領,自易摧破。交鋒之日,蓋為前部,當因事變化,效命在近。」曹公特見行人,密問之,口勑曰:「但恐汝詐耳。蓋若信實,當授爵賞,超於前後也。」又豫備走舸,各繫大船後,因引次俱前。曹公軍吏士皆延頸觀望,指言蓋降。蓋放諸船,同時發火。時風盛猛,悉延燒岸上營落。頃之,煙炎張天,人馬燒溺死者甚衆,軍遂敗退,還保南郡。江表傳曰:至戰日,蓋先取輕利艦十舫,載燥荻枯柴積其中,灌以魚膏,赤幔覆之,建旌旗龍幡於艦上。時東南風急,因以十艦最著前,中江舉帆,蓋舉火白諸校,使衆兵齊聲大叫曰:「降焉!」操軍人皆出營立觀。去北軍二里餘,同時發火,火烈風猛,往船如箭,飛埃絕爛,燒盡北船,延及岸邊營柴。瑜等率輕銳尋繼其後,雷鼓大進,北軍大壞,曹公退走。備與瑜等復共追。曹公留曹仁等守江陵城,徑自北歸。
瑜與程普又進南郡,與仁相對,各隔大江。兵未交鋒,吳錄曰:備謂瑜云:「仁守江陵城,城中糧多,足為疾害。使張益德將千人隨卿,卿分二千人追我,相為從夏水入截仁後,仁聞吾入必走。」瑜以二千人益之。瑜即遣甘寧前據夷陵。仁分兵騎別攻圍寧。寧告急於瑜。瑜用呂蒙計,留凌統以守其後,身與蒙上救寧。寧圍旣解,乃渡屯北岸,克期大戰。瑜親跨馬擽陣,會流矢中右脅,瘡甚,便還。後仁聞瑜卧未起,勒兵就陣。瑜乃自興,案行軍營,激揚吏士,仁由是遂退。
權拜瑜偏將軍,領南郡太守。以下雋、漢昌、瀏陽、州陵為奉邑,屯據江陵。劉備以左將軍領荊州牧,治公安。備詣京見權,瑜上疏曰:「劉備以梟雄之姿,而有關羽、張飛熊虎之將,必非乆屈為人用者。愚謂大計宜徙備置吳,盛為築宮室,多其美女玩好,以娛其耳目,分此二人,各置一方,使如瑜者得挾與攻戰,大事可定也。今猥割土地以資業之,聚此三人,俱在疆場,恐蛟龍得雲雨,終非池中物也。」權以曹公在北方,當廣擥英雄,又恐備難卒制,故不納。
是時劉璋為益州牧,外有張魯寇侵,瑜乃詣京見權曰:「今曹操新折衂,方憂在腹心,未能與將軍道兵相事也。乞與奮威俱進取蜀,得蜀而并張魯,因留奮威固守其地,好與馬超結援。瑜還與將軍據襄陽以蹙操,北方可圖也。」權許之。瑜還江陵,為行裝,而道於巴丘病卒,臣松之案,瑜欲取蜀,還江陵治嚴,所卒之處,應在今之巴陵,與前所鎮巴丘,名同處異也。時年三十六。權素服舉哀,感慟左右。喪當還吳,又迎之蕪湖,衆事費度,一為供給。後著令曰:「故將軍周瑜、程普,其有人客,皆不得問。」初瑜見友於策,太妃又使權以兄奉之。是時權位為將軍,諸將賔客為禮尚簡,而瑜獨先盡敬,便執臣節。性度恢廓,大率為得人,惟與程普不睦。江表傳曰:普頗以年長數陵侮瑜。瑜折節容下,終不與校。普後自敬服而親重之,乃告人曰:「與周公瑾交,若飲醇醪,不覺自醉。」時人以其謙讓服人如此。初曹公聞瑜年少有美才,謂可游說動也,乃密下揚州,遣九江蔣幹往見瑜。幹有儀容,以才辯見稱,獨步江、淮之閒,莫與為對。乃布衣葛巾,自託私行詣瑜。瑜出迎之,立謂幹曰:「子翼良苦,遠涉江湖為曹氏作說客邪?」幹曰:「吾與足下州里,中閒別隔,遙聞芳烈,故來叙闊,并觀雅規,而云說客,無乃逆詐乎?」瑜曰:「吾雖不及夔、曠,聞弦賞音,足知雅曲也。」因延幹入,為設酒食。畢,遣之曰:「適吾有密事,且出就館,事了,別自相請。」後三日,瑜請幹與周觀營中,行視倉庫軍資器仗訖,還宴飲,示之侍者服飾珍玩之物,因謂幹曰:「丈夫處世,遇知己之主,外託君臣之義,內結骨肉之恩,言行計從,禍福共之,假使蘇張更生,酈叟復出,猶撫其背而折其辭,豈足下幼生所能移乎?」幹但笑,終無所言。幹還,稱瑜雅量高致,非言辭所間。中州之士,亦以此多之。劉備之自京還也,權乘飛雲大船,與張昭、秦松、魯肅等十餘人共追送之,大宴會敘別。昭、肅等先出,權獨與備留語,因言次,歎瑜曰:「公瑾文武籌略,萬人之英,顧其器量廣大,恐不乆為人臣耳。」瑜之破魏軍也,曹公曰:「孤不羞走。」後書與權曰:「赤壁之役,值有疾病,孤燒船自退,橫使周瑜虛獲此名。」瑜威聲遠著,故曹公、劉備咸欲疑譖之。及卒,權流涕曰:「公瑾有王佐之資,今忽短命,孤何賴哉!」後權稱尊號,謂公卿曰:「孤非周公瑾,不帝矣。」
10 
瑜少精意於音樂,雖三爵之後,其有闕誤,瑜必知之,知之必顧,故時人謠曰:「曲有誤,周郎顧。」
11 
瑜兩男一女。女配太子登。男循尚公主,拜騎都尉,有瑜風,早卒。循弟胤,初拜興業都尉,妻以宗女,授兵千人,屯公安。黃龍元年,封都鄉侯,後以罪徙廬陵郡。赤烏二年,諸葛瑾、步騭連名上疏曰:「故將軍周瑜子胤,昔蒙粉飾,受封為將,不能養之以福,思立功效,至縱情欲,招速罪辟。臣竊以瑜昔見寵任,入作心膂,出為爪牙,銜命出征,身當矢石,盡節用命,視死如歸,故能摧曹操於烏林,走曹仁於郢都,揚國威德,華夏是震,蠢爾蠻荊,莫不賔服,雖周之方叔,漢之信、布,誠無以尚也。夫折衝扞難之臣,自古帝王莫不貴重,故漢高帝封爵之誓曰『使黃河如帶,太山如礪,國以永存,爰及苗裔』;申以丹書,重以盟詛,藏于宗廟,傳於無窮,欲使功臣之後,世世相踵,非徒子孫,乃關苗裔,報德明功,勤勤懇懇,如此之至,欲以勸戒後人,用命之臣,死而無悔也。況於瑜身沒未乆,而其子胤降為匹夫,益可悼傷。竊惟陛下欽明稽古,隆於興繼,為胤歸訴,乞匄餘罪,還兵復爵,使失旦之雞,復得一鳴,抱罪之臣,展其後效。」權荅曰:「腹心舊勳,與孤協事,公瑾有之,誠所不忘。昔胤年少,初無功勞,橫受精兵,爵以侯將,蓋念公瑾以及於胤也。而胤恃此,酗淫自恣,前後告喻,曾無悛改。孤於公瑾,義猶二君,樂胤成就,豈有已哉?迫胤罪惡,未宜便還,且欲苦之,使自知耳。今二君勤勤援引漢高河山之誓,孤用恧然。雖德非其疇,猶欲庶幾,事亦如爾,故未順旨。以公瑾之子,而二君在中間,苟使能改,亦何患乎!」瑾、隲表比上,朱然及全琮亦俱陳乞,權乃許之。會胤病死。
12 
瑜兄子峻,亦以瑜元功為偏將軍,領吏士千人。峻卒,全琮表峻子護為將。權曰:「昔走曹操,拓有荊州,皆是公瑾,常不忘之。初聞峻亡,仍欲用護,聞護性行危險,用之適為作禍,故便止之。孤念公瑾,豈有已乎?」

魯肅傳》

魯肅子敬,臨淮東城人也。生而失父,與祖母居。家富於財,性好施與。爾時天下已亂,肅不治家事,大散財貨,摽賣田地,以賑窮弊結士為務,甚得鄉邑歡心。
周瑜為居巢長,將數百人故過候肅,并求資糧。肅家有兩囷米,各三千斛,肅乃指一囷與周瑜,瑜益知其奇也,遂相親結,定僑、札之分。袁術聞其名,就署東城長。肅見術無綱紀,不足與立事,乃攜老弱將輕俠少年百餘人,南到居巢就瑜。瑜之東渡,因與同行,
吳書曰:肅體貌魁奇,少有壯節,好為奇計。天下將亂,乃學擊劒騎射,招聚少年,給其衣食,往來南山中射獵,陰相部勒,講武習兵。父老咸曰:「魯氏世衰,乃生此狂兒!」後雄傑並起,中州擾亂,肅乃命其屬曰:「中國失綱,寇賊橫暴,淮、泗間非遺種之地,吾聞江東沃野萬里,民富兵彊,可以避害,寧肯相隨俱至樂土,以觀時變乎?」其屬皆從命。乃使細弱在前,彊壯在後,男女三百餘人行。州追騎至,肅等徐行,勒兵持滿,謂之曰:「卿等丈夫,當解大數。今日天下兵亂,有功弗賞,不追無罰,何為相偪乎?」又自植盾,引弓射之,矢皆洞貫。騎旣嘉肅言,且度不能制,乃相率還。肅渡江往見策,策亦雅奇之。留家曲阿。會祖母亡,還葬東城。
劉子揚與肅友善,遺肅書曰:「方今天下豪傑並起,吾子姿才,尤宜今日。急還迎老母,無事滯於東城。近鄭寶者,今在巢湖,擁衆萬餘,處地肥饒,廬江閒人多依就之,況吾徒乎?觀其形勢,又可博集,時不可失,足下速之。」肅荅然其計。葬畢還曲阿,欲北行。會瑜已徙肅母到吳,肅具以狀語瑜。時孫策已薨,權尚住吳,瑜謂肅曰:「昔馬援荅光武云『當今之世,非但君擇臣,臣亦擇君』。今主人親賢貴士,納奇錄異,且吾聞先哲祕論,承運代劉氏者,必興於東南,推步事勢,當其歷數。終搆帝基,以協天符,是烈士攀龍附鳳馳騖之秋。吾方達此,足下不須以子揚之言介意也。」肅從其言。瑜因薦肅才宜佐時,當廣求其比,以成功業,不可令去也。
權即見肅,與語甚恱之。衆賔罷退,肅亦辭出,乃獨引肅還,合榻對飲。因密議曰:「今漢室傾危,四方雲擾,孤承父兄遺業,思有桓文之功。君旣惠顧,何以佐之?」肅對曰:「昔高帝區區欲尊事義帝而不獲者,以項羽為害也。今之曹操,猶昔項羽,將軍何由得為桓文乎?肅竊料之,漢室不可復興,曹操不可卒除。為將軍計,惟有鼎足江東,以觀天下之釁。規模如此,亦自無嫌。何者?北方誠多務也。因其多務,勦除黃祖,進伐劉表,竟長江所極,據而有之,然後建號帝王以圖天下,此高帝之業也。」權曰:「今盡力一方,兾以輔漢耳,此言非所及也。」張昭非肅謙下不足,頗訾毀之,云肅年少麤踈,未可用。權不以介意,益貴重之,賜肅母衣服幃帳,居處雜物,富擬其舊。
劉表死。肅進說曰:「夫荊楚與國鄰接,水流順北,外帶江漢,內阻山陵,有金城之固,沃野萬里,士民殷富,若據而有之,此帝王之資也。今表新亡,二子素不輯睦,軍中諸將,各有彼此。加劉備天下梟雄,與操有隙,寄寓於表,表惡其能而不能用也。若備與彼協心,上下齊同,則宜撫安,與結盟好;如有離違,宜別圖之,以濟大事。肅請得奉命弔表二子,并慰勞其軍中用事者,及說備使撫表衆,同心一意,共治曹操,備必喜而從命。如其克諧,天下可定也。今不速往,恐為操所先。」權即遣肅行。到夏口,聞曹公已向荊州,晨夜兼道。比至南郡,而表子琮已降曹公,備惶遽奔走,欲南渡江。肅徑迎之,到當陽長阪,與備會,宣騰權旨,及陳江東彊固,勸備與權併力。備甚歡恱。時諸葛亮與備相隨,肅謂亮曰「我子瑜友也」,即共定交。備遂到夏口,遣亮使權,肅亦反命。臣松之案:劉備與權併力,共拒中國,皆肅之本謀。又語諸葛亮曰「我子瑜友也」,則亮已亟聞肅言矣。而蜀書亮傳云:「亮以連橫之略說權,權乃大喜。」如似此計始出於亮。若二國史官,各記所聞,競欲稱揚本國容美,各取其功。今此二書,同出一人,而舛互若此,非載述之體也。
會權得曹公欲東之問,與諸將議,皆勸權迎之,而肅獨不言。權起更衣,肅追於宇下,權知其意,執肅手曰:「卿欲何言?」肅對曰:「向察衆人之議,專欲誤將軍,不足與圖大事。今肅可迎操耳,如將軍,不可也。何以言之?今肅迎操,操當以肅還付鄉黨,品其名位,猶不失下曹從事,乘犢車,從吏卒,交游士林,累官故不失州郡也。將軍迎操,將安所歸?願早定大計,莫用衆人之議也。」權歎息曰:「此諸人持議,甚失孤望;今卿廓開大計,正與孤同,此天以卿賜我也。」魏書及九州春秋曰:曹公征荊州,孫權大懼,魯肅實欲勸權拒曹公,乃激說權曰:「彼曹公者,實嚴敵也,新并袁紹,兵馬甚精,乘戰勝之威,伐喪亂之國,克可必也。不如遣兵助之,且送將軍家詣鄴;不然,將危。」權大怒,欲斬肅,肅因曰:「今事已急,即有他圖,何不遣兵助劉備,而欲斬我乎?」權然之,乃遣周瑜助備。孫盛曰:吳書及江表傳,魯肅一見孫權便說拒曹公而論帝王之略,劉表之死也,又請使觀變,無緣方復激說勸迎曹公也。又是時勸迎者衆,而云獨欲斬肅,非其論也。
時周瑜受使至鄱陽,肅勸追召瑜還。遂任瑜以行事,以肅為贊軍校尉,助畫方略。曹公破走,肅即先還,權大請諸將迎肅。肅將入閤拜,權起禮之,因謂曰:「子敬,孤持鞌下馬相迎,足以顯卿未?」肅趨進曰:「未也。」衆人聞之,無不愕然。就坐,徐舉鞭言曰:「願至尊威德加乎四海,總括九州,克成帝業,更以安車軟輪徵肅,始當顯耳。」權撫掌歡笑。
後備詣京見權,求都督荊州,惟肅勸權借之,共拒曹公。漢晉春秋曰:呂範勸留備,肅曰:「不可。將軍雖神武命世,然曹公威力實重,初臨荊州,恩信未洽,宜以借備,使撫安之。多操之敵,而自為樹黨,計之上也。」權即從之。曹公聞權以土地業備,方作書,落筆於地。
10 
周瑜病困,上疏曰:「當今天下,方有事役,是瑜乃心夙夜所憂,願至尊先慮未然,然後康樂。今旣與曹操為敵,劉備近在公安,邊境密邇,百姓未附,宜得良將以鎮撫之。魯肅智略足任,乞以代瑜。瑜隕踣之日,所懷盡矣。」江表傳載:初瑜疾困,與權牋曰:「瑜以凡才,昔受討逆殊特之遇,委以腹心,遂荷榮任,統御兵馬,志執鞭弭,自效戎行。規定巴蜀,次取襄陽,憑賴威靈,謂若在握。至以不謹,道遇暴疾,昨自醫療,日加無損。人生有死,脩短命矣,誠不足惜,但恨微志未展,不復奉教命耳。方今曹公在北,疆埸未靜,劉備寄寓,有似養虎,天下之事,未知終始,此朝士旰食之秋,至尊垂慮之日也。魯肅忠烈,臨事不苟,可以代瑜。人之將死,其言也善,儻或可採,瑜死不朽矣。」案此牋與本傳所載,意旨雖同,其辭乖異耳。即拜肅奮武校尉,代瑜領兵。瑜士衆四千餘人,奉邑四縣,皆屬焉。令程普領南郡太守。肅初住江陵,後下屯陸口,威恩大行,衆增萬餘人,拜漢昌太守、偏將軍。十九年,從權破皖城,轉橫江將軍。
11 
先是,益州牧劉璋綱維頹弛,周瑜、甘寧並勸權取蜀,權以咨備,備內欲自規,乃偽報曰:「備與璋託為宗室,兾憑英靈,以匡漢朝。今璋得罪左右,備獨竦懼,非所敢聞,願加寬貸。若不獲請,備當放髮歸於山林。」後備西圖璋,留關羽守,權曰:「猾虜乃敢挾詐!」及羽與肅鄰界,數生狐疑,疆埸紛錯,肅常以歡好撫之。備旣定益州,權求長沙、零、桂,備不承旨,權遣呂蒙率衆進取。備聞,自還公安,遣羽爭三郡。肅住益陽,與羽相拒。肅邀羽相見,各駐兵馬百步上,但請將軍單刀俱會。肅因責數羽曰:「國家區區本以土地借卿家者,卿家軍敗遠來,無以為資故也。今已得益州,旣無奉還之意,但求三郡,又不從命。」語未究竟,坐有一人曰:「夫土地者,惟德所在耳,何常之有!」肅厲聲呵之,辭色甚切。羽操刀起謂曰:「此自國家事,是人何知!」目使之去。吳書曰:肅欲與羽會語,諸將疑恐有變,議不可往。肅曰:「今日之事,宜相開譬。劉備負國,是非未決,羽亦何敢重欲干命!」乃自就羽。羽曰:「烏林之役,左將軍身在行間,寢不脫介,自力破魏,豈得徒勞,無一塊壤,而足下來欲收地邪?」肅曰:「不然。始與豫州觀於長阪,豫州之衆不當一校,計窮慮極,志勢摧弱,圖欲遠竄,望不及此。主上矜愍豫州之身無有處所,不愛土地士人之力,使有所庇廕以濟其患,而豫州私獨飾情,愆德隳好。今已藉手於西州矣,又欲翦并荊州之土,斯蓋凡夫所不忍行,而況整領人物之主乎!肅聞貪而棄義,必為禍階。吾子屬當重任,曾不能明道處分,以義輔時,而負恃弱衆以圖力爭,師曲為老,將何獲濟?」羽無以荅。備遂割湘水為界,於是罷軍。
12 
肅年四十六,建安二十二年卒。權為舉哀,又臨其葬。諸葛亮亦為發哀。吳書曰:肅為人方嚴,寡於玩飾,內外節儉,不務俗好。治軍整頓,禁令必行,雖在軍陣,手不釋卷。又善談論,能屬文辭,思度弘遠,有過人之明。周瑜之後,肅為之冠。權稱尊號,臨壇,顧謂公卿曰:「昔魯子敬甞道此,可謂明於事勢矣。
13 
肅遺腹子淑旣壯,濡須督張承謂終當到至。永安中,為昭武將軍都亭侯、武昌督。建衡中,假節,遷夏口督。所在嚴整,有方幹。鳳皇三年卒。子睦襲爵,領兵馬。

呂蒙傳》

呂蒙子明,汝南富陂人也。少南渡,依姊夫鄧當。當為孫策將,數討山越。蒙年十五六,竊隨當擊賊,當顧見大驚,呵叱不能禁止。歸以告蒙母,母恚欲罰之,蒙曰:「貧賤難可居,脫誤有功,富貴可致。且不探虎穴,安得虎子?」母哀而舍之。時當職吏以蒙年小輕之,曰:「彼豎子何能為?此欲以肉餧虎耳。」他日與蒙會,又蚩辱之。蒙大怒,引刀殺吏,出走,逃邑子鄭長家。出因校尉袁雄自首,承間為言,策召見奇之,引置左右。
數歲,鄧當死,張昭薦蒙代當,拜別部司馬。權統事,料諸小將兵少而用薄者,欲并合之。蒙陰賒貰,為兵作絳衣行縢,及簡日,陳列赫然,兵人練習,權見之大恱,增其兵。從討丹楊,所向有功,拜平北都尉,領廣德長。
從征黃祖,祖令都督陳就逆以水軍出戰。蒙勒前鋒,親梟就首,將士乘勝,進攻其城。祖聞就死,委城走,兵追禽之。權曰:「事之克,由陳就先獲也。」以蒙為橫野中郎將,賜錢千萬。
是歲,又與周瑜、程普等西破曹公於烏林,圍曹仁於南郡。益州將襲肅舉軍來附,瑜表以肅兵益蒙,蒙盛稱肅有膽用,且慕化遠來,於義宜益不宜奪也。權善其言,還肅兵。瑜使甘寧前據夷陵,曹仁分衆攻寧,寧困急,使使請救。諸將以兵少不足分,蒙謂瑜、普曰:「留淩公績,蒙與君行,解圍釋急,勢亦不乆,蒙保公績能十日守也。」又說瑜分遣三百人柴斷險道,賊走可得其馬。瑜從之。軍到夷陵,即日交戰,所殺過半。敵夜遁去,行遇柴道,騎皆舍馬步走。兵追蹙擊,獲馬三百匹,方船載還。於是將士形勢自倍,乃渡江立屯,與相攻擊,曹仁退走,遂據南郡,撫定荊州。還,拜偏將軍,領尋陽令。
魯肅代周瑜,當之陸口,過蒙屯下。肅意尚輕蒙,或說肅曰:「呂將軍功名日顯,不可以故意待也,君宜顧之。」遂往詣蒙。酒酣,蒙問肅曰:「君受重任,與關羽為鄰,將何計略,以備不虞?」肅造次應曰:「臨時施宜。」蒙曰:「今東西雖為一家,而關羽實熊虎也,計安可不豫定?」因為肅畫五策。肅於是越席就之,拊其背曰:「呂子明,吾不知卿才略所及乃至於此也。」遂拜蒙母,結友而別。
江表傳曰:初,權謂蒙及蔣欽曰:「卿今並當塗掌事,宜學問以自開益。」蒙曰:「在軍中常苦多務,恐不容復讀書。」權曰:「孤豈欲卿治經為博士邪?但當令涉獵見往事耳。卿言多務孰若孤,孤少時歷詩、書、禮記、左傳、國語,惟不讀易。至統事以來,省三史、諸家兵書,自以為大有所益。如卿二人,意性朗悟,學必得之,寧當不為乎?宜急讀孫子、六韜、左傳、國語及三史。孔子言『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無益,不如學也』。光武當兵馬之務,手不釋卷。孟德亦自謂老而好學。卿何獨不自勉勗邪?」蒙始就學,篤志不倦,其所覽見,舊儒不勝。後魯肅上代周瑜,過蒙言議,常欲受屈。肅拊蒙背曰:「吾謂大弟但有武略耳,至於今者,學識英博,非復吳下阿蒙。」蒙曰:「士別三日,即更刮目相待。大兄今論,何一稱穰侯乎。兄今代公瑾,旣難為繼,且與關羽為鄰。斯人長而好學,讀左傳略皆上口,梗亮有雄氣,然性頗自負,好陵人。今與為對,當有單複以鄉待之。」。密為肅陳三策,肅敬受之,祕而不宣。權常歎曰:「人長而進益,如呂蒙、蔣欽,蓋不可及也。富貴榮顯,更能折節好學,耽恱書傳,輕財尚義,所行可迹,並作國士,不亦休乎!」
時蒙與成當、宋定、徐顧屯次比近,三將死,子弟幼弱,權悉以兵并蒙。蒙固辭,陳啟顧等皆勤勞國事,子弟雖小,不可廢也。書三上,權乃聽。蒙於是又為擇師,使輔導之,其操心率如此。
魏使廬江謝奇為蘄春典農,屯皖田鄉,數為邊寇。蒙使人誘之,不從,則伺隙襲擊,奇遂縮退,其部伍孫子才、宋豪等,皆攜負老弱,詣蒙降。後從權拒曹公於濡須,數進奇計,又勸權夾水口立塢,所以備御甚精,吳錄曰:權欲作塢,諸將皆曰:「上岸擊賊,洗足入船,何用塢為?」呂蒙曰:「兵有利鈍,戰無百勝,如有邂逅,敵步騎蹙人,不暇及水,其得入船乎?」權曰:「善。」遂作之。曹公不能下而退。
曹公遣朱光為廬江太守,屯皖,大開稻田,又令間人招誘鄱陽賊帥,使作內應。蒙曰:「皖田肥美,若一收孰,彼衆必增,如是數歲,操態見矣,宜早除之。」乃具陳其狀。於是權親征皖,引見諸將,問以計策。吳書曰:諸將皆勸作土山,添攻具,蒙趨進曰:「治攻具及土山,必歷日乃成,城備旣脩,外救必至,不可圖也。且乘雨水以入,若留經日,水必向盡,還道艱難,蒙竊危之。今觀此城,不能甚固,以三軍銳氣,四面並攻,不移時可拔,及水以歸,全勝之道也。」權從之。蒙乃薦甘寧為升城督,督攻在前,蒙以精銳繼之。侵晨進攻,蒙手執枹鼓,士卒皆騰踊自升,食時破之。旣而張遼至夾石,聞城已拔,乃退。權嘉其功,即拜廬江太守,所得人馬皆分與之,別賜尋陽屯田六百戶,官屬三十人。蒙還尋陽,未期而廬陵賊起,諸將討擊不能禽,權曰:「鷙鳥累百,不如一鶚。」復令蒙討之。蒙至,誅其首惡,餘皆釋放,復為平民。
10 
是時劉備令關羽鎮守,專有荊土,權命蒙西取長沙、零、桂三郡。蒙移書二郡,望風歸服,惟零陵太守郝普城守不降。而備自蜀親至公安,遣羽爭三郡。權時住陸口,使魯肅將萬人屯益陽拒羽,而飛書召蒙,使捨零陵,急還助肅。初,蒙旣定長沙,當之零陵,過酃,載南陽鄧玄之,玄之者郝普之舊也,欲令誘普。及被書當還,蒙祕之,夜召諸將,授以方略,晨當攻城,顧謂玄之曰:「郝子太聞世間有忠義事,亦欲為之,而不知時也。左將軍在漢中,為夏侯淵所圍。關羽在南郡,今至尊身自臨之。近者破樊本屯,救酃,逆為孫規所破。此皆目前之事,君所親見也。彼方首尾倒縣,救死不給,豈有餘力復營此哉?今吾士卒精銳,人思致命,至尊遣兵,相繼於道。今予以旦夕之命,待不可望之救,猶牛蹄中魚,兾賴江漢,其不可恃亦明矣。若子太必能一士卒之心,保孤城之守,尚能稽延旦夕,以待所歸者,可也。今吾計力度慮,而以攻此,曾不移日,而城必破,城破之後,身死何益於事,而令百歲老母戴白受誅,豈不痛哉?度此家不得外問,謂援可恃,故至於此耳。君可見之,為陳禍福。」玄之見普,具宣蒙意,普懼而聽之。玄之先出報蒙,普尋後當至。蒙豫勑四將,各選百人,普出,便入守城門。須臾普出,蒙迎執其手,與俱下船。語畢,出書示之,因拊手大笑,普見書,知備在公安,而羽在益陽,慙恨入地。蒙留孫河委以後事。即日引軍赴益陽。劉備請盟,權乃歸普等,割湘水,以零陵還之。以尋陽、陽新為蒙奉邑。
11 
師還,遂征合肥,旣徹兵,為張遼等所襲,蒙與淩統以死扞衞。後曹公又大出濡須,權以蒙為督,據前所立塢,置彊弩萬張於其上,以拒曹公。曹公前鋒屯未就,蒙攻破之,曹公引退。拜蒙左護軍、虎威將軍。
12 
魯肅卒,蒙西屯陸口,肅軍人馬萬餘盡以屬蒙。又拜漢昌太守,食下雋、劉陽、漢昌、州陵。與關羽分土接境,知羽驍雄,有并兼心,且居國上流,其勢難乆。初,魯肅等以為曹公尚存,禍難始搆,宜相輔協,與之同仇,不可失也,蒙乃密陳計策曰:「令征虜守南郡,潘璋住白帝,蔣欽將游兵萬人,循江上下,應敵所在,蒙為國家前據襄陽,如此,何憂於操,何賴於羽?且羽君臣,矜其詐力,所在反覆,不可以腹心待也。今羽所以未便東向者,以至尊聖明,蒙等尚存也。今不於彊壯時圖之,一旦僵仆,欲復陳力,其可得邪?」權深納其策,又聊復與論取徐州意,蒙對曰:「今操遠在河北,新破諸袁,撫集幽、兾,未暇東顧。徐土守兵,聞不足言,往自可克。然地勢陸通,驍騎所騁,至尊今日得徐州,操後旬必來爭,雖以七八萬人守之,猶當懷憂。不如取羽,全據長江,形勢益張。」權尤以此言為當。及蒙代肅,初至陸口,外倍脩恩厚,與羽結好。
13 
後羽討樊,留兵將備公安、南郡。蒙上疏曰:「羽討樊而多留備兵,必恐蒙圖其後故也。蒙常有病,乞分士衆還建業,以治疾為名。羽聞之,必撤備兵,盡赴襄陽。大軍浮江,晝夜馳上,襲其空虛,則南郡可下,而羽可禽也。」遂稱病篤,權乃露檄召蒙還,陰與圖計。羽果信之,稍撤兵以赴樊。魏使于禁救樊,羽盡禽禁等,人馬數萬,託以糧乏,擅取湘關米。權聞之,遂行,先遣蒙在前。蒙至尋陽,盡伏其精兵𦩷𦪇中,使白衣搖櫓,作商賈人服,晝夜兼行,至羽所置江邊屯候,盡收縛之,是故羽不聞知。遂到南郡,士仁、麋芳皆降。吳書曰:將軍士仁在公安拒守,蒙令虞翻說之。翻至城門,謂守者曰:「吾欲與汝將軍語。」仁不肯相見。乃為書曰:「明者防禍於未萌,智者圖患於將來,知得知失,可與為人,知存知亡,足別吉凶。大軍之行,斥候不及施,烽火不及舉,此非天命,必有內應。將軍不先見時,時至又不應之,獨守縈帶之城而不降,死戰則毀宗滅祀,為天下譏笑。呂虎威欲徑到南郡,斷絕陸道,生路一塞,案其地形,將軍為在箕舌上耳,奔走不得免,降則失義,竊為將軍不安,幸孰思焉。」仁得書,流涕而降。翻謂蒙曰:「此譎兵也,當將仁行,留兵備城。」遂將仁至南郡。南郡太守麋芳城守,蒙以仁示之,遂降。吳錄曰:初,南郡城中失火,頗焚燒軍器。羽以責芳,芳內畏懼,權聞而誘之,芳潛相和。及蒙攻之,乃以牛酒出降。蒙入據城,盡得羽及將士家屬,皆撫慰,約令軍中不得干歷人家,有所求取。蒙麾下士,是汝南人,取民家一笠,以覆官鎧,官鎧雖公,蒙猶以為犯軍令,不可以鄉里故而廢法,遂垂涕斬之。於是軍中震慄,道不拾遺。蒙旦暮使親近存恤耆老,問所不足,疾病者給醫藥,饑寒者賜衣糧。羽府藏財寶,皆封閉以待權至。羽還,在道路,數使人與蒙相聞,蒙輒厚遇其使,周游城中,家家致問,或手書示信。羽人還,私相參訊,咸知家門無恙,見待過於平時,故羽吏士無鬬心。會權尋至,羽自知孤窮,乃走麥城,西至漳鄉,衆皆委羽而降。權使朱然、潘璋斷其徑路,即父子俱獲,荊州遂定。
14 
以蒙為南郡太守,封孱陵侯,江表傳曰:權於公安大會,呂蒙以疾辭,權笑曰:「禽羽之功,子明謀也,今大功已捷,慶賞未行,豈邑邑邪?」乃增給步騎鼓吹,勑選虎威將軍官屬,并南郡、廬江二郡威儀。拜畢還營,兵馬導從,前後鼓吹,光耀于路。賜錢一億,黃金五百斤。蒙固辭金錢,權不許。封爵未下,會蒙疾發,權時在公安,迎置內殿,所以治護者萬方,募封內有能愈蒙疾者,賜千金。時有鍼加,權為之慘慼,欲數見其顏色,又恐勞動,常穿壁瞻之,見小能下食則喜,顧左右言笑,不然則咄唶,夜不能寐。病中瘳,為下赦令,羣臣畢賀。後更增篤,權自臨視,命道士於星辰下為之請命。年四十二,遂卒於內殿。時權哀痛甚,為之降損。蒙未死時,所得金寶諸賜盡付府藏,勑主者命絕之日皆上還,喪事務約。權聞之,益以悲感。
15 
蒙少不脩書傳,每陳大事,常口占為牋疏。常以部曲事為江夏太守蔡遺所白,蒙無恨意。及豫章太守顧邵卒,權問所用,蒙因薦遺奉職佳吏,權笑曰:「君欲為祁奚耶?」於是用之。甘寧麤暴好殺,旣常失蒙意,又時違權令,權怒之,蒙輒陳請:「天下未定,鬬將如寧難得,宜容忍之。」權遂厚寧,卒得其用。
16 
蒙子霸襲爵,與守冢三百家,復田五十頃。霸卒,兄琮襲侯。琮卒,弟睦嗣。
17 
孫權與陸遜論周瑜、魯肅及蒙曰:「公瑾雄烈,膽略兼人,遂破孟德,開拓荊州,邈焉難繼,君今繼之。公瑾昔要子敬來東,致達於孤,孤與宴語,便及大略帝王之業,此一快也。後孟德因獲劉琮之勢,張言方率數十萬衆水步俱下。孤普請諸將,咨問所宜,無適先對,至子布、文表,俱言宜遣使脩檄迎之,子敬即駮言不可,勸孤急呼公瑾,付任以衆,逆而擊之,此二快也。且其決計策,意出張蘇遠矣;後雖勸吾借玄德地,是其一短,不足以損其二長也。周公不求備於一人,故孤忘其短而貴其長,常以比方鄧禹也。又子明少時,孤謂不辭劇易,果敢有膽而已;及身長大,學問開益,籌略奇至,可以次於公瑾,但言議英發不及之耳。圖取關羽,勝於子敬。子敬荅孤書云:『帝王之起,皆有驅除,羽不足忌。』此子敬內不能辨,外為大言耳,孤亦恕之,不苟責也。然其作軍,屯營不失,令行禁止,部界無廢負,路無拾遺,其法亦美也。」
18 
評曰:曹公乘漢相之資,挾天子而掃羣桀,新盪荊城,仗威東夏,于時議者莫不疑貳。周瑜、魯肅建獨斷之明,出衆人之表,實奇才也。呂蒙勇而有謀斷,識軍計,譎郝普,禽關羽,最其妙者。初雖輕果妄殺,終於克己,有國士之量,豈徒武將而已乎!孫權之論,優劣允當,故載錄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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