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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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毌丘儉)은 자(字)가 중공(仲恭)이고 하동(河東) 문희(聞喜) 사람이다.
부친인 관구흥(毌丘興)은 황초(黃初: 위문제 조비 220-226년) 중에 무위태수(武威太守)를 지내며 반란자는 치고 복종하는 자는 어루만져 하우(河右=하서,황하 상류의 서쪽으로 무위,주천 등 당시의 북서쪽 최변경 지역을 가리킴)를 개통(開通)하니 그 명성이 금성태수(金城太守) 소칙(蘇則)에 다음갔다. (주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적(賊) 장진(張進)과 배반한 호(胡,흉노;북방민족 통칭)를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고양향후(高陽鄕侯)에 봉해졌고 [1] (조정으로) 들어와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1] (진수陳壽의)「위명신주魏名臣奏」에 실려있는 옹주자사(雍州刺史) 장기(張既)의 표(表) – “하우(河右=하서河西)가 아득히 멀고 상란(喪亂)이 오래되었고 무위(武威)는 여러 군(郡)의 도로와 요해처에 닿아 있는데다 또한 민이(民夷,중국백성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며 여러 차례 병난(兵難)을 겪었습니다. 영(領) 태수(太守) 관구흥(毌丘興)이 관직에 부임하여 안으로는 관리와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밖으로는 강(羌), 호(胡)를 품어 끝내 유순하게 귀부시키며 관리로서 힘써 효험이 있었습니다. (주천의) 황화(黃華), (장액의) 장진(張進)이 처음 역란(逆亂)을 도모해 좌우를 선동(扇動)하였으나 관구흥은 지기(志氣,의지와 기개)가 충렬(忠烈)하여 난에 임해 뒤돌아보지 않고 장교(將校), 민이(民夷)들에게 화복에 관해 진술하여 그 말을 하며 체읍(涕泣,눈물흘리며 슬피 욺)했습니다. 당시 남녀 1만 명이 모두 감격하여 형체를 훼손하고 머리털을 흩트린 채 목숨을 바칠 것을 성심으로 맹세했습니다. 뒤이어 정병(精兵)을 이끌고 장액(張掖)을 축협(踧脅,위협)해 (장액)태수 두통(杜通)과 서해태수(西海太守,건안 말 장액군 북쪽에 있는 거연현에 새로 서해군을 설치해 거연택 일대를 관할하게 함) 장목(張睦)을 구원하여 거느렸습니다. 장액군의 번화(番和), 여간(驪靬) 두 현(縣)의 관리, 백성들과 (장액)군(郡)의 잡다한 호(胡)가 악인(→장진)을 저버리고 관구흥에게 나아오니 관구흥이 이들을 모두 안무하고 농사에 힘쓰게 했습니다. 관구흥이 매번 거치는 곳마다 성심으로 진력했으니 실로 나라의 좋은 관리(良吏)입니다. 전하(殿下)가 즉위해 만기(萬機,제왕의 정무)에 유념하시어 가는 털과 같이 작은 선행에도 필히 상록(賞錄)을 내리시니, 신이 엎드려 성지(聖旨)를 좇아 그에 관한 일을 진술합니다.”
※ 220년 하서에서의 장진, 황화 등의 반란 - 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서평에서 국연(麴演)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금성태수 소칙에게 토벌되어 항복합니다. 그 뒤 위왕을 이어받은 조비가 양주(涼州)를 처음 설치해 추기(鄒岐)를 자사(刺史)로 파견하자 국연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장액군의 장진(張進), 주천군의 황화(黃華) 등도 모반해 서로 호응하는 한편, 무위의 세 종족의 胡가 무위군 일대를 침범해 도로를 끊는데, 금성태수 소칙, 장군 학소 등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진병해 胡를 격파하고 무위태수 관구흥을 구원한 뒤, 계속 진격해 그해 5월에 하서지방을 다시 평정합니다. (문제기, 장기전, 소칙전)
※ 중국 북서쪽 지방의 주(州) 변천 (서쪽 → 동쪽)
[후한] 양주 – 사예(장안 등 삼보)
[후한 헌제 194년, 옹주 분립] 옹주(하서 4군) – 양주(농서) – 사예(삼보)
[213년, 구주제 부활] 모두 옹주로 통합
[220년, 조조 죽고 조비가 위왕 즉위 후 양주분립] 양주(하서) – 옹주(농서. 아래 ※) – 사예(삼보)
※ 「진서」지리지에서는 위문제 때 옹주를 분할해 (하서에 양주를 설치하고) 농우(농서)에는 진주(秦州)를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고 하는데 秦州의 경우는 정확히 220년 이때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기,전을 꼼꼼히 다 살피지는 못했으나 당시 옹주자사인 장기가 221년 양주자사로 전임할 때까지 별다른 관직 변경기록이 없는걸 볼 때 이때는 옹주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관구검(毌丘儉)이 부친의 작위(→고양향후)를 물려받았고 평원후(平原侯)의 문학(文學)이 되었다. (※)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상서랑(尙書郎)에 임명되었다가 우림감(羽林監)으로 올랐다. (명제가) 동궁(東宮,태자)일 때부터의 오랜 교분으로써 매우 친대(親待)를 받았다. (외직으로) 나가 낙양(洛陽) 전농(典農)이 되었다. 당시 (명제가) 농민들을 취해 궁실(宮室)을 짓자 관구검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신이 생각건대 천하를 위해 급히 제거해야 할 것은 두 적(賊)(→촉, 오)이고 급히 힘써야 할 것은 의식(衣食,입을것과 먹을 것)입니다. 실로 두 적(賊)이 멸해지지 않은 채 (내버려두고) 사민(士民)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한다면 비록 궁실(宮室)을 아름답게 꾸민다 해도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올랐다.
※ 평원후 문학(平原侯文學) / 노필(盧弼)의「삼국지집해」
: <명제기>에 의하면 황초3년(222년)에 (명제 조예가) 평원왕(平原王)이 되었으니 관구검은 (평원후가 아닌) 평원왕의 문학이 되었다. 이 때문에 아랫글에 ‘동궁 때부터 오랜 교분이 있어 매우 친대를 받았다’는 말이 있는 것이며, 조식(曹植)이 봉해진 평원후(平原侯)가 아니다. 이 관구검전의 侯자는 王자의 오기이고 (평원후X 평원왕O) 관구검은 (평원후문학을 물려받은게 아니라) 부친인 관구흥의 작위인 고양향후를 물려받았다. (明帝紀黃初三年爲平原王 儉爲平原王文學 故下文有以東宮之舊甚見親待之語 非曹植所封之平原侯也 此傳侯字當爲王字之誤 儉襲父興爵高陽鄕侯.) / <儉襲父爵爲平原侯文學>를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평원후(문학)가 되었다’(부친의 작위=평원후)로 읽기도 하는데, 그렇게 읽으면 文學이 해석에서 빠져버리며 앞 문장에서 보듯 관구흥의 작위는 평원후가 아니라 고양향후입니다. 평원후문학은 작위가 아니라 관직명이므로(張舜徽 등의「삼국지사전」평원후문학(平原王文學) 항목에서는 “관직명. 제후왕의 속관이며, 문학연文學掾이 있었다.”고 해설) 儉襲父爵/爲平原侯文學 로 끊어서 별개의 문장으로 읽는게 맞겠죠. 노필의 설명도 이런 취지입니다. 그리고, 조식이 평원후를 지낸 것은 건안16년(211년) – 건안19년(214년)이므로 ‘평원후’라는 말은 역시 이상하고, ‘평원왕’의 오기로 보는게 맞다 생각됩니다. 즉, ‘조예가 태자가 되기 전 평원왕일 때(황초3년- 황초7년) 관구검이 그의 속관으로 봉직하며 친분을 쌓았고 이를 연고로 조예가 황제가 된 뒤 중용되었다.’ <- 대략 이런 취지의 얘기를 한 것입니다.
청룡(靑龍: 위 명제 233-236) 중 황제가 요동(遼東) 토벌을 꾀하니 관구검에게 간책(幹策,재간과 모책)이 있다 하여 그를 (기존의 형주자사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옮기고 도요장군(度遼將軍), 사지절(使持節),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의 직을 더했다. (경초景初 원년인 237년) 유주(幽州)의 제군(諸軍)을 이끌고 양평(襄平,요동군 양평현)에 도착해 요수(遼隧,양평의 남서쪽 지명.공손도전 참조)에 주둔했다.
우북평(右北平) 오환(烏丸)의 선우(單于) 구루돈(寇婁敦), 요서(遼西) 오환의 도독 솔중왕(都督率衆王)(※) 호류(護留) 등 지난 날 (조조가 요서를 정벌할 때) 원상(袁尙)을 뒤쫓아 요동(遼東)으로 달아난 자들이 무리 5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구루돈(寇婁敦)이 동생 아라반(阿羅槃) 등을 보내 궐(闕)로 나아와 조공(朝貢)하게 하니 그 거수(渠率=渠帥.수령,군장) 20여 명을 봉해 후(侯), 왕(王)으로 삼고 각기 차이를 두어 수레와 말(馬), 견직물과 채색비단을 하사했다. 공손연(公孫淵)이 역격해 관구검과 싸우니 (관구검이) 불리하여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듬해(경초2년=238년), 황제가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보내 중군(中軍,중앙군)과 관구검 등의 군대 수만 명을 통수하게 해 공손연을 쳐서 요동을 평정했다. 관구검이 그 공으로 안읍후(安邑侯)로 올려 봉해져 식읍이 3,900호에 달했다.
※ 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 (요서오환도독솔중왕호류)
: 솔중왕(率衆王)은 후한 때 오환, 선비 등의 군장을 회유하기 위해 내리던 관작의 명칭으로 흔히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호류(사람이름임)의 관작명이 요서오환의 도독 + 솔중왕…인 것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명제기>에서 같은 사건을 기술하며 遼西烏丸都督王護留(요서오환도독왕호류)로 적은걸 볼 때 ‘부중들을 도독하며 이끄는 왕’ 정도의 뜻으로 ‘도독솔중왕’ 자체가 왕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오환선비동이전> 배송지 주에 인용된「위략」에서는 ‘호류(護留)’를 ‘호류엽(護留葉)’으로 적고 있습니다. (魏略曰:景初元年秋, 遣幽州刺史毋丘儉率衆軍討遼東. 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葉, 昔隨袁尙奔遼西, 聞儉軍至, 率衆五千餘人降. 寇婁敦遣弟(阿羅奬)[阿羅槃]等詣闕朝貢, 封其渠帥三十餘爲王, 賜輿馬繒采各有差. / 오환선비동이전 주 위략) 삼국지 이 대목과 내용이 거의 똑같은걸 볼 때 진수가「위략」을 참조해서 이 대목을 기술했고, 두 책이 각각 전해지는 과정에서 글자가 와전되어 차이가 생긴 것 같습니다. 구루돈의 동생 아라반(阿羅槃)의 경우에도「위략」에는 아라장(阿羅奬)으로 다르게 적혀 있는데,「삼국지」중화서국본에서는 관구검전 위 대목에 의거해서「위략」의 ‘아라장’을 ‘아라반’으로 고쳤습니다. (중화서국 점교본에서는 교감을 통해 삭제한 글자는 (), 추가한 글자는 []로 표시함)
정시(正始: 제왕齊王 조방曹芳 240-248) 중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킴)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梁의 음은 渴)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 수천명을 참획했다.
※ 구려왕 궁(宮) - 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조에서는 관구검 침공 당시 고구려왕의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하고 이를 줄인 형태로 궁(宮)이란 표기와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位宮이라고 표기하려 했다면 뒤에서는 줄여 쓴다 하더라도 (位가 성이 아니고 位宮 전체가 이름이라는 것을 진수도 알고 있으므로 宮이라 줄이는 것도 엄밀히는 잘못된 것임) 이 권에서 처음 나올때는 완전하게 적어야되는데 그냥 宮이라 한 것은 잘못된 표기입니다. 한편,「삼국사기」에 의하면 관구검침공 당시의 고구려왕은 11대 동천왕(東川王)이고, 동천왕의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어릴때 이름은 교체(郊彘)라 한 반면, 동천왕의 부친인 10대 산상왕(山上王) 연우(延優)의 다른 이름을 位宮이라 적고 있습니다. 위궁을 동천왕이 아닌 산상왕에 연결한 것은 삼국사기의 오류로 보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편 참고.
※ 비류수(沸流水) / 삼국지집해
: 「일통지」에 의하면 비류강(沸流江)이 조선(朝鮮) 강동군(江東郡) 남쪽(지금의 평양 동쪽임)에 있는데 한강으로부터 나뉘어 흐르다 서쪽으로 대동강에서 합해진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건대, 비류수(沸流水)는 응당 지금의 압록강일 것이다. 그에 관한 설명은 본지 동이전을 보라. (一統志 沸流江在朝鮮江東郡南自漢江分流西合於大同江 弼按沸流水當卽今鴨綠江 說見本志東夷傳.) / 대동강 지류인 비류강은 지금도 존재하고 이무렵 사서에 나오는 초기고구려의 비류수와는 별개의 강입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지명을 가지고 온 케이스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쨌든 위 기사에 나오는 것과 같은 초기고구려의 ‘비류수’는 ‘압록강 지류인 지금의 혼강(渾江 : 佟佳江) 이나 그 지류인 부이하(富爾河) 유역의 환인현(桓仁縣) 일대’로 비정됩니다.(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광개토왕릉비 편 각주 참고)
※ 양구(梁口) -「삼국지집해」에서 신하(新河), 웅진강구, 열구, 태자하 등 여러 설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옮기려니 좀 막막해서 -_-; 그냥 생략합니다. 梁口 = (大)梁水의 口 즉, 지금의 태자하(太子河)나 그 지류 어디쯤이고, 위 기사의 정황을 보아 비류수와 만나는 지점일 수 있습니다. 한편「삼국사기」에는 양맥(梁貊)(나라나 부족이름)이나 양맥곡(梁貊谷)(지명)이란 명칭이 종종 등장하는데(동천왕이 서전에서 비류수에 이어 양맥곡에서 관구검을 격파했다 하여 이 관구검전 대목과 연결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그 위치를 동가강(佟佳江)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과의 합류지점인 지금의 부이강 하구로 추정하거나, 대량수(大梁水)가에 있었던 맥족(貊族)에 대한 명칭으로 해석하여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 屠句驪所都 (도구려소도) / 삼국지집해
: 「북사」(권94) 고구려전에 의하면, 정시5년(244년)에 유주자사 무구검(毋丘儉,관구검毌丘儉의 다른 표기)이 현도를 나와 위궁(位宮)을 치고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우니 (위궁이) 패주했다. 무구검이 이를 추격해 혁현(䚂峴, 혁 고개)에 이르러 [※태평어람에는 赬(붉을 정) 통전에는 頳(=赬.붉을 정)으로 표기.중국정사조선전 북사 편 교감기 25번 참고]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丸都山)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태평)「환우기」권173에 의하면, 관구검이 (위궁을) 추격하여 적현(赤峴, 적 고개)에 이르렀고 현거속마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참수했다. (독사)「방여기요」권38에 의하면, 환도성(丸都城)은 비류수(沸流水)의 동쪽에 있었다. [※독사방여기요(청나라 때 저작임) 권38 山東 九는 외국지리를 고증하는 대목으로 조선 경기도 조의 환도성 항목에서 왕경(=서울)의 동북쪽 운운하는 엉뚱한 얘기는 있으나 인용문과 같은 대목은 없습니다. 출전을 잘못 적은거 같습니다.] (北史 高句麗傳 正始五年 幽州刺史毋丘儉出玄菟 討位宮 大戰于沸流 敗走 儉追至䚂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寰宇記卷百七十三儉追至赤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斬首萬餘級. 方輿紀要卷三十八 丸都城在沸流水之東.)
구려(句驪)의 패자(沛者)로 그 이름이 득래(得來)인 자가 있어 수차례 궁(宮)에게 간언했으나 [1] 궁(宮)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봉호(蓬蒿,쑥)가 자라나는 꼴을 곧 보겠구나.”
그리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온 나라에서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에 명해 그의 묘(墓)를 허물지 않고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처자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1] 신 송지(松之,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가 보건대 (권30)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패자(沛者)는 구려국(句驪國)의 관직 이름이다.
궁(宮)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正始)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2]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2]「세어世語」(晉 곽반郭頒의 위진세어) 왈, 왕기(王頎)는 자(字)가 공석(孔碩)이고 동래(東萊) 사람이다. 진(晉)나라 영가(永嘉: 회제 307-313) 중 (낙양을 공격해 진나라 회제를 포획한) 대적(大賊) 왕미(王彌)가 왕기(王頎)의 손자이다.
※ 매구(買溝) / 삼국지집해
: 심흠한(沈欽韓, 청淸) 왈, (삼국지 권30) 동이전(동옥저 조)에서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여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漊)라 하며(중화서국본에는 置溝婁로 표기) 이는「후한서」동이전(동옥저 조)에서도 같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조에 의하면) 구루(溝漊)는 구려(句麗,고구려)에서 성(城)을 가리키는 이름이라 했으니 이는(→위에서 買溝라 한 것은) 置를 買로 잘못 적은 것이며 또한 漊 자가 탈락된 것이다. (沈欽韓曰 東夷傳北沃沮一名置溝漊 後漢書東夷傳同 溝漊者 句麗名城也 此誤置爲買 又脫漊字.) / 심흠한은 위의 買溝(매구)를 置溝婁(漊)(치구루, 즉 북옥저)의 오기로 본 것입니다.(매구X, 치구O) 내용을 볼 때 관구검전의 買溝(매구)와 동옥저 조의 置溝漊(치구루)는 서로 같은 것으로 북옥저를 가리킨다는 설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 영락20년 조 동부여정벌기사에 나오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의 ‘미구루(味仇婁)’를 관구검전의 買溝와 같은 실체로 보는 설이 있고(노태돈.한국고대금석문 역주 참고), 또「삼국사기」에 매구곡(買溝谷)이란 지명이 등장하는 걸 볼 때(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 삼국사기 권14 대무신왕 13년 조), 거꾸로 置溝(치구)를 買溝(매구)의 오기로 보는게 더 맞지 않을까 합니다. (치구X 매구O) [買溝(漊)(관구검전) = 置溝(漊)(동옥저전. 買溝의 오기?) = 味仇婁(광개토왕릉비) = 買溝谷(삼국사기) = 북옥저(나 그에 속한 소국이나 지역명)]
cf.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삼국사기」의 매구곡을 호동왕자 낙랑국의 전설이나 매소홀(인천), 매성(양주) 등의 지명에 비추어 중북부지방의 지명 등으로 추정했는데, 그보다는 이 관구검전의 買溝와 같은 것, 즉 북옥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삼국사기」의 최리 낙랑국에 관해 평양이 아니라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했다가 서기30년 동부도위 폐지 이후 실질적으로 자립한 이른바 영동7현의 재지세력들이 낙랑국을 자칭했거나 대외적으로 그렇게 인식되었다는 설이 있는데(임기환「고구려와 낙랑」), 대무신왕대 고구려의 팽창과정-특히 옥저, 동예의 복속- 와중에 언급되는 買溝는 관구검전의 買溝와 같은 것으로 북옥저의 소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 (과옥저천유여리 지숙신씨남계 각석기공 간환도지산 명불내지성)
: ‘옥저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 남계에까지 이르렀고 / 刻石紀功 하여 환도산과 불내성에 刊銘했다’는 식으로 읽는게 더 맞지않나 싶은데(즉, 각석기공한 것은 환도산, 불내성의 2개), 의미단락을 분명히 구분해서 서술한 북사, 양서, 통전, 자치통감, 삼국사기 등의 다른 사서 기록들을 고려해 위에서처럼 풀었습니다. (예를 들어「북사」고구려전은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자치통감」은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而還,所誅ㆍ納八千餘口.”) 그리고, 이 중 ‘환도산에 刊했다’는 것이 1906년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로 보입니다. (한편, 중국정사조선전 북사 편에서는 위 문장을 “또 丸都山을 깍아서 不耐城이라 새겨두고 돌아왔다.”로 풀었습니다. 환도산=불내성이란 전제에서 刊銘한 것이 2개가 아니라 하나이고, 불내성에 새긴 것이 아니라 ‘불내성’이란 명문을 남겼다는 뜻의 풀이인데, 이미 발견된 관구검기공비가 있으므로 이렇게 볼순 없겠죠.)
※ 옥저와 숙신 / 삼국지집해
: 옥저에는 둘이 있었으니 그 하나가 동옥저(東沃沮)라 하며 또한 남옥저(南沃沮)라고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북옥저(北沃沮)라 하며 남옥저로부터 8백여 리 떨어져 있었다. 불내성(不耐城)은 동옥저가 거처하던 곳으로,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서 동옥저에 이르고 또한 추격하여 북옥저에 이른 것이다.「일통지」에 의하면, 옛 옥저 땅은 지금의 조선 동북쪽 경계이고 불내성(不耐城)은 지금의 조선 함흥부(咸興府) 북한현(北漢縣)에 있었다. (한나라때) 낙랑군에 속했고 동부도위가 이곳을 다스렸다.(동부도위의 치소였다) 반고의 한서지리지의 낙랑군 불이(不而)현이 즉 이것이다. 而(이)와 耐(내)는 옛 글자에서 서로 통했다. (不而=不耐 라는 말) 호삼성(胡三省,원元) 왈, 위나라 때 동이(東夷)의 읍루국(挹婁國)이 즉 예전의 숙신씨(肅愼氏)다. (沃沮有二 一曰東沃沮 亦曰南沃沮 一曰北沃沮 去南沃沮八白餘里 不耐城東沃沮所居也 儉征高句麗至東沃沮 又追至北沃沮也. 一統志古沃沮地今朝鮮東北境 不耐城在今朝鮮咸興府北漢縣 屬樂浪郡東部都尉治此. 班志樂浪郡不而卽此 而耐古字通 胡三省曰 魏東夷挹婁之國卽古肅愼氏也.)
※ 불내(不耐) / 국사편찬위윈회 중국정사조선전 삼국지 편의 역주
: 『漢書』「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불내예로 비정되는 함경도)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위 관구검전 대목을 제가 풀이한 것처럼 丸都山에 刊하고 不耐城에 銘했다..로 읽고, 전자는 이미 발견된 관구검기공비이나 후자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의 實例이다.
※ 관구검 기공비 /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인용.
(판독문)
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復遺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巍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侯▨」行裨將軍領▨」▨裨將軍」
(번역)
정시(正始) 3년(242년)에 고구려(高句驪)가 반(反)하자,
7장군(將軍)을 거느리고 구려(句驪)를 토벌하였다. 5(年에;244)
(고구려가) 다시 구략(寇略)하자, (토벌하고) 6년 5월에 (군사를) 돌이켰다.
討寇將軍 巍烏丸單于▨ 토구장군 외오환선우X
威寇將軍 都亭侯▨ 위구장군 도정후X
行裨將軍領▨ 행비장군 령X
▨裨將軍 X비장군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참고) 위 한국고대금석문의 번역은, 3행에서 ‘(고구려가) 유구(遺寇,침범)하는데 (관구검이) 6년 5월에 회군했다’하는게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중간에 ‘(관구검이) 토벌하고’란 말을 추가해서 풀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건 결락된 부분이 아님에도 문장 하나를 임의로 집어넣어 풀이한 셈이고 관구검전 기사에 따라 짜맞춘 느낌도 듭니다. 비문의 아랫부분이 깨져있어서 각 행의 뒷부분에 몇자가 더 있었는지를 알 수 없고(비문 이미지는 위 링크 참조), 이에 관련해서 2행 뒤에 年一無 등의 글자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에 따르면 ‘정시 3년에 고구려가 反하자 (관구검이) 7아문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고 (정시) 5년에 (고구려가 일체) 다시 침범하는 일이 (없으므로) 정시 6년 5월에 회군했다’로 풀이됩니다. 전체문맥상 이렇게 無 등의 부정어가 누락된 형태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 합니다.
※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에 관련된 기록 정리 (원문은 중국정사조선전에서 인용)
①「삼국지」권4 <삼소제기>(제왕 조방)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정시)7년(246년) 봄 2월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고, 여름 5월에 예맥(濊貊)을 쳐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② 권28 <관구검전>
: 위에서처럼 정시 연간 1차 정벌[고구려 도읍을 도륙하고 동천왕 패주], 정시6년(245년) 2차 정벌[다시 공격하자 동천왕은 매구로 도주, 이를 추격하여 옥저를 지나 숙신씨 남계에까지 이름]로 서술.
③ 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조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爲幽州刺史毌丘儉所破. 語在儉傳.
정시3년(242년)에 (고구려의) 궁(宮)(→동천왕)이 서안평을 침범하였고 정시5년(244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 말은(이와 관련된 얘기는) 관구검전에 있다.
cf. 「삼국지집해」에서 노필(盧弼)은 삼소제기와 관구검전 등에서 연대가 서로 다른 것을, 정벌전의 시작을 정시 5년, 마무리된 것을 정시 7년으로 추정하였음.(儉傳, 正始中, 儉督諸軍, 討高句驪. 六年, 復征之. 齊王紀, 七年, 儉討高句驪, 破之. 蓋用兵數年, 此傳記其始, 齊王紀記其終也.)
④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 조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恆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남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고…(중략)…왕기(王頎)가 따로 군대를 보내 궁을 뒤쫓아 공격하여 그(→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⑤「양서梁書」권54 동이열전 고구려 조
正 始三年, 位宮寇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 位宮將步騎二萬人逆軍, 大戰於沸流. 位宮敗走, 儉軍追至峴, 懸車束馬, 登丸都山, 屠其所都, 斬首虜萬餘級,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정시3년(242년), 위궁(位宮)이 서안평을 침범했다. 정시5년(244년), 유주자사 무구검(毋丘儉,관구검의 다른 표기)이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가 위궁(位宮)을 쳤다. 위궁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무구검)군을 역격하여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주하니 무구검군이 추격하여 현(峴,고개)에 이르러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참획하였고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6년(245년), 무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황급히) 제가(諸加)를 거느린 채 옥저로 달아났고 무구검이 장군 왕기(王頎)를 시켜 이를 추격하게 하여 옥저를 가로지르며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다.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글자를 새기고 돌아왔다.
⑥「북사北史」권94 고구려전
正 始三年, 位宮寇遼 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 討位宮, 大戰於沸流. 敗走, 儉追至䚂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
정시3년(242), 위궁(位宮)이 요(동) 서안평을 침범했다. (정시)5년(244), 유주자사 무구검이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가 위궁을 쳐서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우니 (위궁이) 패주했다. 무구검이 추격하여 혁현(䚂峴,혁 고개)에 이르고 현거속마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위궁이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6년(245), 무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황급히) 제가(沃沮)를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무구검이 장군 왕기(王頎)를 시켜 이를 추격하게 하니 옥저를 가로지르며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각석기공하였다. 또한 환도산에 刊하고 불내성에 銘한 뒤에 돌아왔다.
(cf.「통전」변방전 고구려조 기사는 위의 양서나 북사 기사와 거의 똑같으므로 생략합니다.)
⑦「삼국사기」권17 동천왕 20년(246년) 조
: 중국측 기록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우리의 고유한 전승기록을 수록해서 상당히 다른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체원문과 번역문은 디지털한국학 참조)
<<동천왕 20년 (246년, 위나라 정시7년) 가을 8월, 관구검 1만 군사로 침범 – 보기 2만으로 비류수 가에서 역격해 고구려가 이기고 3천여 급 참수 – 양맥곡(梁貊谷)에서 다시 싸워 3천여 급 참획 – 위나라 군대를 얕잡아보고 공격하다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항전하자 1만 8천여 명이 죽는 등 대패, 동천왕은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남 –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하고 왕기를 보내 동천왕을 추격 – 동천왕이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러 밀우, 유유 등의 활약으로 위기를 면함 – 위나라의 각석기공과 득래 일화 추가(관구검전 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보임) >>
일단 위의 노필(삼국지집해)의 설처럼 관구검의 첫 원정이 시작된 건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라 대략 정시 5년(244)이고, 정시 7년(246)이라고 한 <삼소제기>는 예맥 격파를 포함해 전체 원정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중앙 조정에 보고되거나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포상이 행해진 시점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삼국사기」의 경우는 우리측 고유사료와 중국측 기록이 서로 배치될 경우는 대체로 우리측 기록이나 또는 더 풍부한 쪽의 기사에 따랐는데, (내용전개에 관해서는 우리측 기록이 상세했으나) 기년에 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거나 불명확해 연도에 관한 한 <삼소제기>나「자치통감」등을 참고해 동천왕 20년(정시 7년) 조에 수록한 것으로 보입니다.「삼국지」관구검전이나「양서」등 중국측 기록에 따라 1차, 2차로 나눠서 보는게 일반적인 거 같은데, 좀더 상세한「삼국사기」의 기술대로 전체를 일련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가령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시3년(242) 동천왕의 요동 서안평 공략 - 정시 5년(244) 8월, 관구검 침공 개시 – 고구려가 서전에선 승리했으나 결국 대패하고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주 – 10월, 환도성 함락하고 왕기를 보내 동천왕 추격(이게 이른바 2차 침공이고 이때 관구검은 환도성 근처에서 머물며 겨울을 나거나 되돌아 감?) – 왕기와 휘하 군대가 동옥저 공격 – 밀우, 유유 등의 활약으로 위기 모면 – (동천왕 소재를 추적하기 위해 군사를 나누었거나 동천왕이 북옥저로 다시 도주했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왕기군 북옥저 진격하여 숙신 남계에까지 이름 – 정시 6년(245) 5월, (관구검 포함 전군 또는 왕기군) 환군 (관구검기공비)
좌장군(左將軍) 가절(假節) 감예주제군사(監豫州諸軍事,예주의 제반 군무를 감독) 영(領,겸직의 의미)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올랐다가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전임했다. 제갈탄(諸葛誕)이 동관(東關,오나라와의 국경인 유수구 북쪽의 요새)에서 싸워 불리하자 이에 영을 내려 제갈탄과 관구검(의 임지와 관직)을 서로 바꾸니, 제갈탄이 진남(장군), 도독예주(都督豫州,예주 도독)가 되고 관구검이 진동(장군), 도독양주(都督楊州)가 되었다. 오나라 태부(太傅) 제갈각(諸葛恪)이 합비(合肥)의 신성(新城)을 포위하자 관구검이 문흠(文欽)과 함께 이를 막았고, 태위(太尉) 사마부(司馬孚,사마의의 동생임)가 중군(中軍)을 지휘해 동쪽으로 와서 포위를 풀자 제갈각이 퇴환했다.
※ 위나라 제갈탄 등의 남벌과 오나라 제갈각의 북벌 - 252년(가평嘉平 4년) 11월, 위나라 대장군 사마사(司馬師)의 주도아래 [249년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고평릉 사건) 보정대신으로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曹爽)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뒤 251년에 죽고, 그의 아들인 사마사가 이어받음] 왕창, 관구검, 제갈탄 등이 3갈래 방면에서 대대적으로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제갈탄이 동관에서 패하자 모두 퇴각함. / 253년 3월 오나라의 제갈각이 출병해 위나라의 신성을 포위했다가 함락하지 못하고 7월에 퇴각함. (오서 삼사주전, 위서 삼소제기, 자치통감)
당초 관구검(毌丘儉)은 하후현(夏侯玄), 이풍(李豊) 등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양주자사(揚州刺史) 전장군(前將軍) 문흠(文欽)은 (249년 사마의에 의해 숙청된) 조상(曹爽)의 읍인(邑人,동향인)으로, 효과추맹(驍果麤猛,용맹과감하고 거칠고 사나움)하여 수차례 전공을 세웠고 (적과의 전투에서의) 노획품을 부풀려 (보고하길) 좋아해 이로써 (조정의) 총상(寵賞,영총과 포상)을 구했으나 대부분 허락되지 않자 원한(怨恨)이 날로 심해졌다. 관구검이 이를 헤아려 문흠을 후대하여 두 사람의 우의가 돈독해졌고 문흠 또한 감격하여 (관구검을) 떠받들고 성심으로 대하며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
※ 하후현, 이풍 등은 당시 권신인 사마사에 대척하던 인물들로, 사마사에 의해 모반죄에 걸려 254년(정원正元 원년) 초에 숙청됩니다. 이 사건 등을 포함해 사마사의 전횡에 분을 품은 당시 황제인 조방(曹芳)이 사마사를 몰아내려다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는데, 이 낌새를 알아챈 사마사가 이해 9월에 조방을 제왕(齊王)으로 쫓아내고 10월에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曹髦)를 새 황제로 추대합니다.
정원(正元) 2년(고귀향공, 255년) 정월, 수십 장에 이르는 혜성(彗星)이 나타나 서북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오(吳), 초(楚)의 분야에서 떠올랐다. 관구검, 문흠이 기뻐하며 이를 자신들에게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다. 마침내 태후(太后)의 조서를 칭탁해 대장군 사마경왕(司馬景王,사마사司馬師)의 죄상을 적어 여러 군국(郡國)에 돌리고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로 주둔하던 회남(淮南)의 장수(將守,수비장)들을 위협하고 아울러 크고 작은 관리, 백성들을 모두 수춘성(壽春城)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성 서쪽에 제단을 만들고 삽혈(歃血,희생의 피를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는 것)하며 칭병(稱兵,거병)할 것을 맹세했다. 노약자들을 나눠 (수춘)성을 지키게 하고 관구검, 문흠은 스스로 5-6만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항(項,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렀다. 관구검은 (항현 성을) 굳게 지키고 문흠은 바깥에 있으면서 유병(游兵,유격병,기동부대)으로 활약했다. [1]
[1] 관구검(毌丘儉), 문흠(文欽) 등이 표(表)를 올려 말했다 –
“예전 상국(相國) 사마의(司馬懿)가 위실(魏室,위나라 황실)을 광보(匡輔,보필)해 대대로 섬기며 충정(忠貞)했으니 이 때문에 열조(烈祖) 명황제(明皇帝,위명제 조예)께서 (죽으며) 그에게 기탁(寄託)하는 임무를 주었고 사마의가 육력(戮力,진력;협력)하며 충절을 다해 화하(華夏,중국)를 안녕시켰습니다. 또한 제왕(齊王,폐출된 조방曹芳)이 총명하여 덕을 더럽히는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성심으로 부지런히 충성을 다하며 윗사람을 보필하니 천하가 이에 힘입었습니다. 사마의는 두 적(虜)을 토멸해 우내(宇內,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여 처음으로 군량(軍糧)을 나누었고 평정하는 날에 일제히 거병하려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제왕(齊王)은 사마의에게 자신을 보필한 큰 공이 있다 하여 이 때문에 사마사(司馬師)로 하여금 사마의의 업(業)을 승통(承統)하게 하고 대사(大事)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사마사(司馬師)는 성년(盛年)으로 재직하며 질병이 없으면서도 있다고 칭탁하여 강병(彊兵)을 끼고 앉아 신하로서의 예의를 차리지 않아 조신(朝臣)들은 그를 그릇되이 여기고 의사(義士)들은 그를 나무라 천하가 모두 이를 들어서 잘 아는 바이니, 이것이 그의 첫번째 죄입니다.
사마의(司馬懿)는 계획을 세워 적(賊)을 취하고자 하여 군량을 많이 찧어두고(준비해두고) (적을 공격할) 기한을 정했습니다. 사마사는 대신(大臣)으로서 국난을 제거하고 또한 자식으로서 부친의 업(業)을 완성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애성(哀聲,곡소리?)이 미처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내 이를 그만두어 신하로서 불충하고 자식으로서 불효했으니, 이것이 그의 두번째 죄입니다.
적이 물러나며 동관(東關)을 지나자 자신은 편안히 앉아 군사를 일으켜 삼정(三征,※)이 함께 진격하게 해 군사를 상하고 패적(敗績,대패)하고 여러 해에 걸쳐 충실히 해둔 군(軍)을 다 없애버려, 적이 쳐들어와 천하를 소동(騷動)케 하고 (백성들을) 죽거나 다치고 유리(流離,떠돌아다님.유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세번째 죄입니다.
적(賊)이 거국적으로 모든 군사를 동원해 50만이라 칭하면서 수춘으로 향해 오며 낙양으로 나아가려 꾀하자 때마침 태위 사마부(司馬孚)가 신 등과 더불어 계책을 세우니 이에 험요한 곳을 틀어막고는 그들과 더불어 쟁봉하지 않고 신성(新城)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습니다. 회남(淮南)의 장사(將士,장졸)들이 충봉리인(衝鋒履刃,적진을 부딪치며 칼날을 밟음)하며 밤낮으로 서로 지키고 백일동안 근췌(勤瘁,수고하고 지침)하여 죽은 자가 땅에 널릴 정도였으니, 위나라에 군(軍)이 있은 이래 위난으로 인해 심하게 고통받은 것이 이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 그러나 사마사는 자신의 마음대로 하여 (이들에게) 봉상(封賞)할 것을 논의하지 않고 권세(權勢)를 자유자재로 하여 봉상받거나 공이 기록된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네번째 죄입니다.
※ 하작(何焯,청) 왈, (오나라) 제갈각이 (253년 북벌하여) 비록 신성(新城)에서 꺾였으나 이 표를 보건대 또한 한때의 강대(强對,강적)였도다. (何焯曰 諸葛恪雖挫於新城 以此表觀之 亦一時之强對也. / 삼국지집해)
옛 중서령(中書令) 이풍(李豊) 등은 사마사(司馬師)에게 신하로서의 절의가 없다 하여 그를 물러나게 할 일을 의논하려 했습니다. 사마사가 이를 알아채고 이풍을 (오도록) 청하고는 그날 저녁에 때려 죽이고 시신을 실어내어 관에 넣어 묻었습니다. 이풍 등은 대신(大臣)이며 제왕(帝王)의 복심(腹心,측근,심복)인데도 (사마사가) 함부로 혹독하고 난폭한 짓을 가하였고 그를 죽이면서도 죄명(罪名)조차 없었으니 사마사에게 무군지심(無君之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다섯번째 죄입니다.
사마의는 (생전에) 늘 탄식하며 말하길, 제왕(齊王,조방)은 인주(人主,임금)의 지위를 스스로 감당할 만하고 군신(君臣)의 의(義)가 정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제왕 조방이) 직무를 섬긴 이래 열다섯 째 해에 이르러 처음으로 정무를 챙기고자 하여 무고(武庫,무기고)를 안행(按行)하고는 조서를 내려 금병(禁兵)들이 함부로 나가지 말도록 했습니다. 사마사는 간특한 짓을 하여 인신(人神)이 보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거짓으로 꾸며 군주(君主)를 폐출하며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사마부(司馬孚)는 사마사(司馬師)의 숙부로 그 성정이 심히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쫓겨나는) 제왕(齊王)을 뒤쫓아 전송하며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뭇 신하들이 모두 분노하였으나 사마사는 잔인한 마음을 품고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의 여섯번째 죄입니다.
또한 옛 광록대부(光祿大夫) 장집(張緝)을 죄없이 주살하고 그의 처자를 죽였고 아울러 모후(母后,황태후,황후 등의 총칭)에까지 화가 미쳐 지존(至尊)을 핍박하여 강제로 독촉해 내보내니 (※이 사건에 연루되어 폐출된 조방의 장황후가 장집의 딸임) 그 일이 닥쳤을 때 애악(哀愕,슬프고 놀람)하여 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사는 칭경(稱慶,축하함)하며 도리어 기뻐했으니, 이것이 그의 일곱번째 죄입니다.
폐하께서 제위에 올라 총명(聰明), 신무(神武)하시어 성심(聖心)으로 다스리고 성약(省約,간략함)을 숭상하고자 하니 천하가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사는 스스로 뉘우쳐 신하로서의 예의를 닦아 회복하지 않고, 바야흐로 군사를 불러모아 궁내(宮內)를 훼손하고 열후(列侯)로써 자신을 보위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했을 때 당초 (칭병하며) 조근(朝覲,조현)하지도 않다가, 폐하께서 친히 사마사의 집에 행차해 그의 병을 위문하려 하자 또한 이를 거절하며 통하지 않게 하고 법도(法度)를 받들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의 여덟번째 죄입니다.
근자에 영군(領軍) 허윤(許允)이 진북(장군)에 부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허윤이) 주전(廚錢,궤짝의 돈? 공금?)을 (함부로) 사여했다 하여(※<하후현전>에 의하면 관물을 낭비했다는 죄로 허윤이 진북장군 임지로 출발하기 전 체포되어 정위에 넘겨짐) 사마사가 이를 상주하여 고발해 형벌을 가하였고, 비록 (겉으로는) 유배형에 처한다고 말했으나 도로에서 굶겨 죽이니 천하에서 이를 듣고 애통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아홉번째 죄입니다.
세 방면의 (변경)수비가 하루 아침에 궐폐(闕廢)되고 정병(精兵)을 여럿 뽑아 이로써 자신의 영(營)을 보위하고 다섯 영(營)이 거느리는 군사에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않고 많은 기장(器杖,무기)을 실어내어 자신의 본영(本營)에 쌓아두니 천하에서 이를 듣고 사람들이 저마다 분원(憤怨)을 품었고 와언(譌言,유언비어)이 길에 가득차 해내(海內)를 의심에 빠뜨렸습니다. 이것이 그의 열번째 죄입니다.
많은 수비병들을 쉬게 하며 고제(高第,성적 우수자)를 (자신이) 차지하고 사표(四表,사방 끝,천하)를 공허하게 하여 강대한 권세를 함부로 휘두르고자 했고 간사한 마음을 왕성하게 하여 둔전(屯田)을 모아 차지하고 그들에게 다시 상을 내렸고 무력을 믿고 잔인하게 굴며 구법(舊法)을 파괴하고 어지럽혔습니다. 여러 번왕(藩王), 공(公) 들을 모아 업(鄴)에 기거하게 하며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고 하루 아침에 거사하여 임금을 내쫓았습니다. 하늘은 악을 기르지 않아 눈의 종기(目腫)가 다스려지지 않게 하였으니(使目腫不成???), 이것이 그의 열한번째 죄입니다.
신 등의 선인(先人,선조)이 모두 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조조曹操)를 수종하며 흉포한 이들을 정토(征討)하여 큰 공을 세웠고 고조(高祖) 문황제(文皇帝)(→조비曹丕)가 즉위하여 한나라의 선양을 받아 나라를 열고 가업을 계승하니 이는 요임금, 순임금이 서로 제위를 전한 것과 같습니다. 신이 안풍(安豊)의 호군(護軍) 정익(鄭翼)(※220년에 여강군을 갈라 안풍군 신설함), 여강(廬江)의 호군(護軍) 여선(呂宣), (여강)태수 장휴(張休,장소의 아들 장휴와는 동명이인), 회남(淮南)태수 정존(丁尊)(※구강군을 회남국으로 위나라 초에 개칭하였고 뒤에 郡이 됨), 독수합비호군(督守合肥護軍,합비를 도독하며 수비하는 호군이란 뜻으로 그 자체가 관명이기도 함) 왕휴(王休) 등과 의논하길, 각기 누대에 걸쳐 은혜를 입었는데 천년의 풍진(風塵,병란)을 만나니 구명(軀命,신명身命)을 다할 것을 생각하여 이로써 사직(社稷)을 완전하게 하고 임금을 안정시키는데 힘쓰자 하였습니다. 만약 이 뜻을 세울 수 있다면, 비록 처자를 불태우고 숯을 삼키고 몸에 옻칠을 하고(전국시대 초 지백智伯을 위해 조양자趙襄子에게 복수하려 했던 예양豫讓의 일을 말함)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사마사(司馬師)의 죄를 살펴보건대 대벽(大辟,사형)을 가해 간특함을 밝게 드러냄이 마땅합니다. (그러나)「춘추」의 뜻에서 1세(一世,일대一代)에서 선행을 하면 10세(一世)에 걸쳐 (그 선행을 감안해 다른 죄를 지어도) 용서해준다 합니다. (사마사의 부친인) 사마의(司馬懿)가 큰 공을 세워 해내(海內)에 기록될 정도였으니 옛 전의(典議)에 의거해 사마사를 (죽이지는 않고 단지 대장군 직을) 폐해 후(侯)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사마사(司馬師)의 동생 사마소(司馬昭)는 충숙관명(忠肅寬明,충성스럽고 공경히 처신하며 너그럽고 현명함)하고 낙선호사(樂善好士,선행을 즐기고 선비를 좋아함)하여 세속을 초월한 군자(君子)의 도량을 갖추고 있고 충성스런 마음으로 나라를 위했으니 사마사와 같지 않습니다. 신 등이 쇄수(碎首,머리를 부숨)할 각오로 보증하는 바이니 가히 사마사를 대신해 성궁(聖躬,임금의 몸)을 보도(輔導,도와서 올바로 이끔)할 만 합니다. (※)
※ 이안계(李安溪,청) 왈, (결국 고귀향공을 시해하게 될 사마소를 이렇게 평하니) 이 어찌 (관구검, 문흠을 두고) 남을 잘 알아보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李安溪曰 此豈爲知人者乎. / 삼국지집해)
태위 사마부(司馬孚,사마의의 동생이자 사마사의 숙부)는 충효(忠孝)롭고 소심(小心,삼가함)하니 의당 친총(親寵)하여 보부(保傅,천자의 교육,자문 등을 맡은 최고급 관직의 통칭)의 직을 주어야 합니다. 호군 산기상시(護軍散騎常侍) 사마망(司馬望,사마부의 아들)은 공사(公事)에 충실히 임하여 담당관리들이 그를 유능하다 칭하였고 멀리 승여(乘輿)를 영접하여 숙위(宿衞)한 공이 있으니 중령군(中領軍)으로 삼을만합니다. 「춘추」의 뜻에서 대의멸친(大義滅親,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죽임)이라 하였으므로 주공(周公)은 동생을 주살하고 석작(石碏)은 자식을 주륙하고 계우(季友)는 형을 짐살했으니 위로는 나라를 위한 계책이고 아래로는 종족을 보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순임금이) 곤(鯀)을 죽이고 (곤의 아들인) 우(禹)를 임용한 것을 성인(聖人)의 밝은 전범이라고 고금에서 칭합니다. (※사마사를 폐출하고 동생인 사마소 등을 임용하도록 청하는 것을 비유한 것)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 등이 상주한 바를 내려보내어 조당(朝堂)에서 널리 의논하게 하십시오. 신의 말에 따라 사마사(司馬師)가 자신의 지위를 현명한 자에게 양보하고 파병(罷兵), 거비(去備,방비함을 없앰)하여 삼황(三皇,위무제,문제,명제/삼국지집해)의 옛 법대로 한다면 천하가 협동(協同)할 것입니다. 만약 사마사가 위세에 의지하고 무릿수를 믿고서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신 등은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겸행(兼行)하여 오로지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신 등이 금일 상주하는 바는 오로지 대위(大魏,위나라)가 길이 존속하도록 하고, 폐하께서 임금의 뜻을 펼쳐 행하고 끊어지고 망하는 화(禍)를 멀리하여 백성들이 안전(安全)하고 육합(六合,우주,천하)이 일체가 되도록 하며, 충신(忠臣) 의사(義士)들로 하여금 삼황오제(三皇五帝)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은 군대가 봉기하여 천하가 요란(擾亂)해질 것을 우려하여 신이 임의로(輒) 상사(上事)하고 삼정(三征, ※)과 주(州), 군국(郡國)의 전농(典農)에게 보내 각기 관장하는 관리와 백성을 안위(安慰)하여 망동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삼가 이에 관해 갖추어서 아룁니다. 오로지 폐하께서 정신(精神)을 사랑하고 기르시고 밝은 사려로 위해(危害)를 염려하시어 해내(海內)를 안녕시키길 바랍니다. 사마사(司馬師)가 권력을 전단하고 위세를 부려 상벌을 자기 임의대로 하니 신 등이 거병했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하조하여 관문과 나룻터를 막아서 끊고 역서(驛書)가 통하지 않도록 하고 함부로 다시 징조(徵調)하여 수포(收捕,체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사마사가 (지멋대로) 지은 조서이지 폐하의 조서가 아닐 것이니 저희들은 이를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은 길이 멀어 문서가 모두 통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임의로(輒) 때에 맞추어 상벌하고 편의종사(便宜從事,형편에 따라 처리함)하고 (사마사가) 평정되는 때를 기다려 상표하겠습니다.”(須定表上???)
※ 三征(삼정) - 기본적으로는 '세 명의 사정(四征)장군'이란 뜻이나 삼국지 권21 부하전 및 배송지 주로 인용된 전략(사마표 찬)을 보면 252년에 ‘정남대장군 왕창, 정동장군 호준, 진남장군 관구검’ 세 명을 통틀어서 '三征'으로 칭하고 있어 꼭 사정장군에 국한되는 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해 호삼성은 “무구검(관구검의 다른 표기)은 (사정장군이 아니라) 바야흐로 (사진장군의 하나인) 진남장군이 되었는데 (그를 포함하여) 삼정(三征)이라 말한 것은 史에서 (엄밀하지 않게) 대략적으로 말한 것이다.”(毋丘儉方爲鎭南, 而曰三征,史槪言之)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의 관구검 표문에서 '삼정에게 격문을 보냈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회남과 형주의 오나라쪽 전선을 담당하던 사정+사진장군의 합칭으로 실제로 종종 쓰였던 말인 듯하고, 이 표문에서 말하는 두번째의 三征은 ‘정남대장군 왕창, 정동장군 호준, 진남장군 제갈탄’의 합칭으로 짐작됩니다.
대장군(大將軍)(→사마사)이 중군(中軍)과 외군(外軍)을 통수해 관구검군을 치고, 따로 (진남장군 도독예주인) 제갈탄(諸葛誕)을 시켜 예주(豫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안풍진(安風津,※)에서 수춘(壽春)으로 향하게 하고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준(胡遵)은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초(譙), 송(宋) 사이로 출병하여 그의 귀로(歸路)를 끊게 했다. 대장군은 여양(汝陽,여남군 여양현)에 주둔하며 감군(監軍) 왕기(王基)에게 전봉(前鋒,선봉)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남돈(南頓,여남군 남돈현)에서 관구검군을 기다리게 했다.
※ 안풍진(安風津) – 안풍현(安風縣)에 있던 회수 가의 나루터. 참고로, 위나라가 오나라와 대치할 때 후한 때 양주(楊州)의 구강군(九江郡)과 여강군(廬江郡) 일부를 차지하고 이 일대의 군현을 대폭 개편하는데, 후한때의 예주 여남군을 분할해 익양군(弋陽郡)을 신설하고 위나라가 확보한 여강군의 일부 현으로 안풍군(安豊郡)을 신설해 모두 예주에 소속시킵니다. (여강군의 나머지 현은 여강군으로 그대로 유지함. 오나라의 여강군도 그 남쪽에 병존했음) 또한 구강군을 회남(淮南)군(바로 관구검의 본거지)으로 고쳐 이 여강군, 회남군을 양주에 소속시킵니다. 이 안풍현(安風縣)은 후한때 군국 기준으로는 양주 여강군 안풍현이고, 위나라 이후 기준으로는 예주 안풍군(安豊郡) 안풍현(安風縣)이 됩니다.
여강군 일부 -> 안풍군 (예주)
여강군 (양주) (오나라의 여강군과 병존)
구강군 -> 회남군 (양주)
이제 제군(諸軍)들이 모두 견벽(堅壁)한 채 더불어 싸우지 않아 (※) 관구검, 문흠은 진격하여 싸울 수 없고 퇴각하자니 수춘이 습격받을까 두려워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계책이 궁해져 어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회남(淮南)의 장사(將士,장졸)들은 집이 모두 북쪽(→중국 내지)에 있어 중심(衆心,뭇 사람들의 마음)이 저산(沮散,꺾이고 흩어짐,궤산)하여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지니 오직 회남(淮南)에서 새로 귀부한 농민(農民)만이 그를 위해 부려질 뿐이었다.
※ 堅壁勿與戰 (견벽물여전) / 삼국지집해 (아래 원문과 해석문 중의 []는 삼국지집해의 진서 인용문 중에서 생략된 글을 추가한 것)
: 이는 정무(鄭袤, 정태鄭泰의 아들임)의 계책이다.「진서」(권44) 정무전에 의하면, [관구검이 작란하여 사마사가 이를 치러 출병할 때 어떤 계책을 우선적으로 써야 할지 묻자] 정무가 답하길, “[예전에 관구검과 함께 대랑(상서랑)을 지내 그에 대해서 특히 잘 아는데] 관구검은 모책을 좋아하나 사정(事情,사리)에 통달하지 못하고 [전에 유주幽州에서 훈공을 세운 이래 그가 바라는 바가 무한하며] 문흠은 용맹하나 꾀가 없습니다.(無算) 이제 대군(大軍)이 출기불의(出其不意)하여, 강회(江淮)의 병졸들(→관구검군)이 날카로우나 굳지는 못하니 해자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여 그들의 기세를 꺾는 것이 아부(亞夫,주아부)가 쓴 것과 같은 장책입니다.” 하였다.(※한나라 때 주아부가 견벽堅壁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吳, 초楚를 격파하였다 / 호삼성 주) <<此鄭袤之策也 晉書鄭袤傳 袤曰 [昔與儉俱爲臺郎 特所知悉] 毌丘儉好謀而不達事情 [自昔建勳幽州 志望無限] 文欽勇而無算今大軍出其不意 江淮之卒銳而不能固 深溝高壘以挫其氣, 此亞夫之長也.>>
대장군이 연주자사(兗州刺史) 등애(鄧艾)를 보내 태산(泰山)의 제군(諸軍) 만여 명을 지휘해 낙가(樂嘉)에 이르러 약세를 보여 그를 유인하고는 대장군이 곧이어 수(洙,※)로부터 도착했다. 문흠이 이를 알지 못하고 과연 밤중에 와서 등애 등을 습격하였는데 때마침 날이 밝아 대군(大軍)의 병마(兵馬)가 많은 것을 보고는 이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1]
※ 洙(수) / 삼국지집해
: 조일청(趙一淸,청) 왈, 洙(수)는 許(허)의 오기로 의심된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건대, 洙(수)는 汝(여)로 적어야 맞다. 윗 문장에서 ‘대장군이 여양(汝陽)에 주둔했다’ 했으니 바로 이것이다.「진서」경제기(사마사)에서는 ‘경제가 여양에 주둔하고 잠군(潛軍)으로 함매(銜枚,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군사들에게 하무를 물림)하여 곧바로 낙가(樂嘉)로 나아갔다’ 하였다.” (趙一淸曰 洙疑許之誤 弼按洙當作汝 上文大將軍屯汝陽是也 晉書景帝紀 帝屯汝陽潛軍銜枚, 徑造樂嘉.) /「삼국지사전」에서는「수경주」에 의거해서 강이름으로서 사수(泗水)의 지류로 설명해놓았는데 지리관계를 볼 때 좀 이상하고, 汝의 오기로 본「삼국지집해」의 설명이 더 맞는거 같습니다.
[1]「위씨춘추魏氏春秋」(동진, 손성孫盛) 왈, 문흠(文欽)의 중자(中子,맏이나 막내가 아닌 가운데 아들)인 문숙(文俶)은 어릴 때 이름이 앙(鴦)(→문앙文鴦)으로,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문흠에게 말했다, “(적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때이니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2대(隊)로 나누어 밤중에 군(軍)을 협공(夾攻,양 갈래로 공격함)했다. 문숙이 장사(壯士)들을 이끌고 먼저 도착해 대장군(→사마사)을 큰 소리로 부르니 군중(軍中)이 놀라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문흠이 기약한 시간에 늦어 접응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문숙이 물러났고 문흠 또한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위말전魏末傳」왈, 전중인(殿中人)으로 성(姓)이 윤(尹), 자(字)가 대목(大目)인 자(→윤대목)는 어려서 조씨(曹氏)의 가노(家奴)가 되어 늘 황제 곁에서 시중들었었는데 (※) 대장군이 (관구검을 치러 나설때)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윤대목(尹大目)은 (문흠군의 습격에 놀라) 대장군의 눈알 하나가 이미 튀어나온 것을 알고는 (대장군에게) 여쭈었다,
“문흠은 본래 명공(明公)의 복심(腹心,심복)이었으나 다만 다른 이에 의해 그르쳐졌을 뿐이며 또한 천자와 같은 향리인입니다. 저 윤대목이 예전에 문흠의 신뢰를 받았으니 (제가) 그를 뒤쫓아가 공과 다시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설득하게 해 주십시오.”
대장군이 이를 들어주어 윤대목을 보내 홀몸으로 가게 하니, 큰 말을 타고 개갑(鎧甲,갑옷)을 입고는 문흠을 뒤쫓아가 멀리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윤대목은 내심 실제로는 (사마사를 위하는게 아니라) 조씨(曹氏)의 안녕을 바랐으므로 (※) 그릇되이(에둘러서) 말하길,
“군후(君侯)는 어찌 며칠을 더 참지 못하시오!”
라 하며 (※) 문흠이 그 뜻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흠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는 이내 큰 목소리로 윤대목을 욕하며 말했다,
“너는 선제(先帝,예전 황제)의 가인(家人)으로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사마사(司馬師)와 함께 반역하였다. 상천(上天,하늘)을 돌아보지 않으니 하늘이 너를 돕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활을 당기고 화살을 채워 윤대목을 쏘려 하자 윤대목이 울면서 말했다,
“세사(世事,세상사;대세)가 어그러졌소. 스스로 잘 노력해보시오.”
※ 전중인(殿中人) 윤대목(尹大目) / 삼국지집해
: 호삼성(胡三省, 원元) 왈, (윤)대목이 당시에 전중교위(殿中校尉)였다. 조일청(趙一淸) 왈, 이 사람이 즉 사마의가 시켜 조상(曹爽)을 유인하도록 한 그 자이다. (胡三省曰 大目時爲殿中校尉. 趙一淸曰 此人卽司馬懿令其誘曹爽者.) / 조상전 주「위진세어」나「진서」선제기에 의하면, 고평릉 사건 때(249년 정월, 조상曹爽이 황제와 함께 고평릉에 참배하러 간 틈을 타 사마의가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장악하였고 결국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음) 전중교위 윤대목을 세객으로 보내 ‘(죽이지는 않고) 관직에서 파면하기만 하겠다’고 맹세하며 조상에게 투항하도록 설득하자 조상이 그 말을 믿고 투항하지만 끝내 모반죄를 걸어서 다 죽여버립니다. 이때 문흠에게 윤대목은 ‘사마씨에게 붙어 주인을 배신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지금은 자신에게마저 해를 끼치려는 배은망덕한 자’ 정도로 보였겠죠.
※ 大目心實欲曹氏安 (대목심실욕조씨안) / 삼국지집해
: 호삼성 왈, 윤대목이 조상을 (투항하도록) 설득할 때는 아직 사마씨를 의심하지 못했다가 그가 문흠을 뒤쫓아 대화를 나눌때에 이르러 깨달았을 뿐이다. (胡三省曰 尹大目說爽 猶未疑司馬氏也 至其追語文欽乃覺耳.) / 고평릉 사건 때 윤대목을 시켜 조상을 설득하게 하는 대목(자치통감 권75)의 호삼성 주인데, 호삼성은 윤대목이 조상을 설득할 때 이미 조상을 배신하고 사마씨의 사람이 된 건 아니고 윤대목 또한 사마의에게 속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 君侯何苦若不可復忍數日中也 (군후하고약불가부인수일중야) /「자치통감」호삼성 주
: 문흠이 어찌 며칠을 더 참고 견디며 사마사와 서로 맞서지 않느냐는 뜻으로, 사마사의 병이 이미 위독하니 필시 변고가 있으리라는 말이다. (蓋謂文欽何不堅忍數日, 與師相持, 師病已篤, 必當有變也.)
대장군이 효기(驍騎,용맹한 기병)를 풀어 추격하여 그를 대파하였고 문흠은 달아났다. 이 날 관구검은 문흠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밤중에 달아나고 무리가 붕괴하였다. 신현(愼縣,여남군 신현)에 도착했을 때 좌우의 사람과 병사들이 점차 관구검을 버리고 떠났고 관구검은 홀로 동생인 관구수(毌丘秀), 손자 관구중(毌丘重)과 함께 물가의 풀숲에 숨었다.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일반백성(民)인 장속(張屬)이 나아가 활을 쏘아 관구검을 죽이고 그 목을 경도(京都)로 보냈다. 장속은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관구수, 관구중은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갔다. 장사(將士)들 중 관구검, 문흠에게 박협(迫脅,협박)되었던(위협받아 뒤따랐던) 자들은 모두 귀항(歸降,투항)했다. [2]
[2] 문흠(文欽)이 곽회(郭淮)에게 보낸 서신 –
“대장군 소백(昭伯,조상曹爽의 자字)이 태부(太傅)(→사마의司馬懿)와 함께 (명제의) 고명(顧命)을 받아 (명제께서 그를) 상(牀)에 오르게 하여 (친근히) 팔을 잡으며 천하의 일을 맡겼으니 이는 멀고 가까운 이들이 모두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다 뒤에 (사마의가 조상을 죽여) 그의 제사를 끊기게 하고 그의 친당(親黨)들에게까지 (화가) 미쳤으니,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준걸들이라 가히 애통한 일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공후(公侯,상대방인 곽회에 대한 경칭)께서는 특히 대사마공(大司馬公)(→조상曹爽의 부친인 대사마 조진曹眞)과 더불어 은친(恩親)을 나누어 의(義)가 금석을 꿰뚫듯 했으니 (조상과 그 친당들이 주살되던) 당시에 더욱 괴롭고 가슴아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으리라 생각합니다. (251년) 왕태위(王太尉)(→태위 왕릉王淩)는 그(→사마의)가 조정을 전단하는 것을 미워하여 은밀히 거병하고자 했으나 그 일이 끝내 성공하지 못해 또한 주멸되었고 그 해가 초왕(楚王,조조의 아들인 조표曹彪. 왕릉이 그를 옹립하려다 실패하고 죽음)에까지 미쳤으니 이를 매우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태부(太傅)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인 사마사(司馬師)가 부친의 업(業)을 이어받아서는 방자하게 포학한 짓을 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임금을 내쫓고 황후를 시해하며 충량한 이들을 잔륙(殘戮)하고 화심(禍心,재앙을 일으키려는 마음,못된 마음)을 품어 마침내 (제위를) 찬탈하고 (임금을) 시해하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방관하며) 참을만한 일이라면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저 문흠은 명의(名義), 대고(大故)로써 임금을 섬김에 절의가 있어 충분(忠憤,충의로 인한 분한 마음)이 안으로부터 솟아 잠자고 먹는 것을 잊고 아끼고 돌아보는 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때마침 관구자방(毌丘子邦,관구검의 아들인 관구전毌丘甸의 字가 子邦)이 스스로 부친(→관구검)의 서신을 (제게) 주었는데 그곳에서 전하길, 공후(公侯)께서 임금을 섬기는 의(義)를 다하여 백발(白髮)로 (※) 떨쳐 일어나 태공(太公,태공망 여상)을 본받고 동쪽에서 (거병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를 기다려 영향(影響), 상응(相應)하려 하니 서로 소식을 주고 받는 날에 이르러 어찌 강개(慷慨)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처자식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고 관구진동(毌丘鎭東,진동장군 관구검)과 함께 의병(義兵) 3만여 명을 일으켜 서쪽으로 경사(京師,수도)로 향하여 왕실을 부축하고 간신역도들을 쓸어없애고자 하였는데, 발꿈치를 들고 (간절히) 서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대의) 소식을 듣지 못하니 노(魯)나라가 고자(高子)를 바랐던 일이라도 이보다는 더 급박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인(仁)에 관해서는 사양해선 안되는 법인데(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임금의 어려움을 구하는 일이겠습니까. 길이 멀고 어려움을 헤아린 까닭에 끝내 기요(期要,기한을 약정함)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건너는 처지라 안위(安危)의 세(勢)가 같은데 재앙와 고통이 이미 잇달아서 말을 꾸며서 풀릴 일이 아니니 공후(公侯)께서 분명히 밝히십시오. (???)
※ 欲奮白髮(욕분백발) / 삼국지집해
: 곽회는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니 정원(正元) 연간인 이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7-80살이 되었을 것이다. (郭淮於建安中擧孝廉 至正元時當已七八十矣.)
(우리가) 함께 조씨(曹氏)를 섬기고 위나라 조정에 신의를 쌓아온 것은 길 다니는 (보통) 사람들도 모두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조정 선비들은 이익을 탐하고 구차하게 살아남고자 하니 이는 열사(烈士)가 수치스러워하고 공후(公侯)께서도 업신여길 일입니다. 고수(賈豎,상인의 멸칭.장사꾼)라도 차마 못할 일인데 하물며 (우리같은) 당도(當塗)의 선비(권세를 잡거나 요직을 맡은 선비)겠습니까! 군(軍)이 항(項)에 주둔하고 소인(小人)은(저는) 윤월(윤 정월) 16일에 따로 진병하여 낙가성(樂嘉城)에 이르러 사마사를 치니 사마사의 무리들이 곧이어 붕궤(崩潰)하여 그들이 베이고 끊어졌고 다시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다만 장구(長驅,멀리 달려감)해 곧바로 경사(京師,수도 즉 낙양)로 향하려 했으나, 유언(流言,근거없는 소문)이 먼저 이르러 관구(毌丘)(→관구검)가 이를 다시 상세히 헤아리지 않고 또한 소인(小人)이(제가) 그르친 것으로 여기니 이리하여 제군(諸軍)이 곧 와해되었습니다. 관구(毌丘)가 되돌아 달아나니 (제가) 뒤쫓아가 오해를 풀려했으나 미치지 못했습니다. 소인(小人)은 항(項)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왕기(王基) 등의 12군(軍)을 만나 관구(毌丘)를 뒤쫓다가 진병하여 이를 쳐서 즉시 격파하였고 향하는 곳마다 전승(全勝,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군대가 없으니(無繼) 어쩌겠습니까? 외로운 군사가 양창(梁昌,수춘 북쪽으로 추정/삼국지집해)에 이르러 진퇴(進退)할 바를 잃어 수춘(壽春)으로 돌아가 의거하려 했으나 수춘이 또한 함락되어 낭패(狼狽)스럽고 지애(躓閡,쓰러 넘어지고 방해받음)하고 다른 계책도 없었으니 오직 대오(大吳,오나라)에 귀명(歸命,귀순)하여 군대를 빌리고 군량을 청해 오운(伍員,춘추시대 때 오자서)을 본받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차라리) 복예(僕隸,종복)가 되는 편이 나으니 어찌 쾌심(快心)으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길이 조씨(曹氏)에게 적게라도 혈식(血食,제사용 제물)을 받을 수 있게 하느니만 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대국(大國)이 돕고 염려해주는 바입니다. 공후께 바라건대, 정영(程嬰), 저구(杵臼)가 전대(前代)에 이름을 날리나 (※) 유독 대위(大魏,위나라)에만 응양(鷹揚,하늘을 나는 매처럼 위엄있고 용맹함)의 선비가 없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 정영, 저구 / 삼국지집해
: 「사기」조세가(趙世家)에 의하면 도안고(屠岸賈)가 조씨(趙氏)를 멸하자 조삭(趙朔)의 객(客)인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조삭의 벗인 정영(程嬰)이 모의하여 조씨(趙氏)의 고아를 숨겼고 뒤에 끝내 도안고를 멸했다. (史記 趙世家 屠岸賈滅趙氏 趙朔客公孫杵臼 朔友人程嬰 謀匿趙氏孤兒後卒滅屠岸賈.)
지금 대오(大吳,오나라)가 대의(大義)를 두텁게 숭상하니 (위나라의 변고에 대해) 심히 민도(愍悼,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라에 대해 대분(大分)으로 연접(連接)되고 멀리 하나의 세(勢)를 함께 하니 날마다 함께 거사하여 중국을 과분(瓜分,박을 쪼개듯 분할함)하고자 하는 것이지 편취(偏取)하여 스스로 소유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공후께서 필시 (저와) 함께 모질게 마음먹고는 흉회(胸懷)를 통수하여(忍帥胸懷)(?) (※) 마땅히 세(勢)를 광대하게 하고자 하나 진천(秦川)의 병졸만 외로이 거사할 수 없다고 우려하실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의당 굴기신인(屈己伸人,자신을 굽히고 남을 펴게 함)하여 목숨을 맡겨 한나라(→촉한)에 귀부해야 하니 동쪽과 서쪽이 함께 이와 같이 거사하면 가히 사마사 일당을 극정(克定,이기고 평정함)할 수 있습니다. 제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시고 만약 제 계책이 따를만 하면 의당 한나라 군사로 하여금 (거사할) 기요(期要,기한)를 정하게 할 것이니 육합(六合, 천,지,사방.온 천하)이 교고(校考,조사? 교정?)되어 (우리는) 주공, 소공과 같이 봉해지고 (조씨의?) 아손(兒孫,자손)에게 맡겨야 합니다. 이는 또한 작은 일이 아니나 대장부(大丈夫)가 어찌 낙낙(落落,외로운 모양을 형용)함에 처했다 하여 이로써 충심(忠心)을 드러내는 일을 멀리하겠습니까. 때를 잘 맞춰(너무 늦지않게) 반가운 답변이 있기를 바랍니다.”
※ 忍帥胸懷 (인수흉회) / 삼국지집해
: 송본(宋本)에는 師(사)가 帥(수)로 적혀있다. (※삼국지집해본에는 忍師胸懷로 적었으므로 이런 주석을 달았음) 이 곳에는 오자나 탈자가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宋本師作帥 此處疑有脫誤.) / 帥, 師 어느쪽이든 해석이 매끄럽게 잘 되지가 않습니다. 오탈자 고려없이 주어진 문장대로만 본다면 帥쪽이 좀더 자연스럽고, 흉회(胸懷)는 보통 흉금과 같은 말로 쓰이는데 이 문맥에서는 ‘곽회가 거느리던 직속군사’ 정도의 뜻으로 쓰인 걸로 보면 대충 뜻은 통하는거 같습니다.
이때는 곽회가 이미 죽은 뒤였으나 문흠은 이를 알지 못했으므로 이 서신을 보낸 것이다.
/ 「세어世語」왈, 관구검이 주살당하고 (그의) 당여(黨與,일당) 7백여 명이 시어사(侍御史) 두우(杜友)에게 넘겨져 치옥(治獄,옥사를 다스림)되니 오직 수사(首事,주동함,먼저 봉기함)한 자 10명만 보고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도록 상주했다. 두우(杜友)는 자(字)가 계자(季子)이고 동군(東郡) 사람이며, 진나라에서 벼슬하여 기주자사, 하남윤을 지냈다. 아들인 두묵(杜默)은 자(字)가 세현(世玄)으로 이부랑(吏部郎), 위위(衞尉)를 역임했다.
※ 이 무렵 사건순서 정리
:「삼국지」위서 삼소제기,「진서」경제기,「자치통감」의 기술들이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①「삼국지」위서 삼소제기(고귀향공)
- 정원2년(255년) 1월 12일(乙丑), 진동장군 관구검, 양주자사 문흠 반란. 25일(戊寅), 대장군 사마경왕(사마사)이 이를 공격. 30일(癸未), 거기장군 곽회 죽음.
- 윤1월 16일(己亥), 낙가(樂嘉)에서 문흠 격파. 문흠은 도주하였다가 오나라로 달아남. 21일(甲辰), 안풍진 도위가 관구검을 베고 그 수급을 경도로 보냄. 29일(壬子), 관구검, 문흠에 연루된 다른 이들을 사면하고 진남장군 제갈탄(諸葛誕)을 진동대장군으로 삼음.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죽음.
- 2월 5일(丁巳), 위장군 사마문왕(사마소)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
②「진서」경제기 & 중화서국본 교감기
: 특히 날짜기록이 ①과 꽤 다른데, 오류로 생각되는 대목은 괄호 안에 적었습니다.
- 1월, 관구검, 문흠이 난을 일으켜 격문을 돌림
- 2월, 관구검군이 6만 군사를 이끌고 회수를 건너 서진하자(1월 기사가 그대로 이어지는 건데 2월이라고 잘못 덧붙인 것으로 보임. 아래 교감기1 참고) 사마사가 조신들과 정토계획을 의논하고는 戊午일, 중군(中軍)의 보기 10여 만으로 공격. (2월 무오일은 6일, 1월 무오일은 5일이나 둘다 아니고, 위 삼국지 해당대목으로 볼 때 (1월) 戊寅의 오기로 보임. 교감기 2 참고) 甲申일에 은교(濦橋)에 주둔. (2월에 갑신일 없음. 윤1월 초하루가 갑신일이므로 여기서부터 윤1월의 기사로 보임. 교감기3 참고) 이후 낙가전투와 문흠 패주, 관구검 죽음
- 윤월 辛亥일(이해 윤월은 윤1월이고 윤1월 신해일은 28일. 위 삼국지 해당대목과 비교하면 하루 차이), 허창에서 사마사가 죽으니 이때 나이 48세.
「진서」중화서국 점교본 교감기 1 / 二月儉欽帥六萬渡淮而西 - 위지 고귀향공기(①을 말함)에 의하면 문흠, 관구검이 거병한 것은 정원2년 정월 12일 을축일의 일이고 위지 관구검전 주에서 인용한 문흠이 곽회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소인이(제가) 윤월 16일에 따로 진병하여 낙가성(樂嘉城)에 이르러 사마사를 쳤습니다.” 하였다. 고귀향공기에서는 윤월 기해일에 낙가에서 문흠을 격파하고 갑진일에 관구검을 참수했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 해는 윤 정월이며(1월-윤 1월-2월의 순서) 기해일은 윤 정월 16일이고 갑진일은 (윤 정월) 21일이니, 관구검, 문흠이 거병하여 패하게 된 것은 2월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일을 2월의 일로 적은 것은 오류로 보인다. (二月儉欽帥六萬渡淮而西 魏志高貴鄉公紀稱,儉、欽起兵在二年正月十二日乙丑,魏志毌丘儉傳注引欽與郭淮書云:「小人以閏月十六日別進兵,就於樂嘉城 討師.」高貴鄉公紀謂閏月己亥破欽於樂嘉,甲辰斬儉首.按:是年閏正月,己亥為閏正月十六日,甲辰為二十一日,儉、欽起兵及事敗皆在二月以前.此繫於二 月,恐誤)
교감기 2 / 戊午帝統中軍步騎十餘萬以征之 – 살펴보건대, 戊午일은 2월 6일이고 이때는 문흠, 관구검이 이미 패한 뒤다. 심가본(沈家本)의 삼국지쇄언(三國志瑣言)에서는 戊午는 戊寅의 오류라 했다. 문흠, 관구검이 정월 12일에 거병하고 사마사가 정월 25일에 출정하였으니 그 설이 응당 옳다. 이를 2월의 일로 적은 것은 잘못이고 날짜의 간지 또한 잘못되었다.[2월 戊午(X), 1월 戊寅(O)] (戊午帝統中軍步騎十餘萬以征之 按:「戊午」為二月初六,時欽、儉巳敗.沈家本三國志瑣言謂「戊午」為「戊寅」之誤.欽、儉以正月十二日起兵,司馬師以 正月二十五日戊寅出征,其說當是.此繫於「二月」下非,日干亦誤.)
교감기 3 / 甲申次于濦橋 - 甲申일은 윤 정월 초하루다. 은교에 주둔한 것은 사마사가 죽은 것과 더불어 모두 윤월 간에 있었던 일이다. 아래 글의 閏月 두 글자가 응당 甲申 앞에 있어야 하며 (閏月 甲申이 맞고 이 뒤로는 윤1월의 기사라는 말) 통감 권76에서 증험된다. (甲申次于濦橋 甲申為閏正月初一.次於濦橋與司馬師之死,皆閏月間事.下文「閏月」二字當冠在「甲申」上,通鑑七六可證.)
③ 한편,「자치통감」에서는 이들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는데,「진서」쪽의 오류를 답습한 대목이 있습니다.
- 정원 2년 1월, 관구검, 문흠 거병해 5-6만 군사로 회수 건너 항현에 주둔. 조정에서 논의 끝에 戊午일에 사마사가 중외의 제군을 이끌고 정토. (앞서 본 바와 같이「삼국지」의 ‘1월 戊寅’,「진서」의 ‘2월 戊午’ 의 차이를 ‘1월 戊午’로 정리한 셈인데, 戊午는 1월로 치면 5일이라 사건전개상 무리가 있고 교감기2에서처럼「삼국지」의 ‘1월 戊寅’으로 보는게 맞다 생각됩니다).
- 윤월(윤1월) 甲申일(1일) 사마사가 은교 주둔. 癸未일, 정서장군 곽회 죽음 (윤1월에 계미일 없음. 어떤 기사를 근거로 이렇게 정리했는지 모르겠으나 위「삼국지」에서처럼 1월 계미일 즉, 1월 30일로 보는게 맞겠죠. 그리고 곽회전,삼소제기에 의하면 이때 곽회는 기존 정서장군에서 거기장군으로 영전한 상태임) 이어서 낙가전투와 문흠 패주. 壬寅일(19일), 오나라 손준(孫峻)이 탁고(橐皋)에 도착하자 문흠 부자가 군영으로 와서 투항함. 甲辰일(21일), 안풍진의 백성 장속이 관구검을 참수해 목을 경도로 보냄. 그리고 제갈탄이 수춘성으로 진군해 평정함. 辛亥일(28일), 사마사가 허창에서 죽음. (「삼국지」의 壬子와「진서」의 辛亥 중「진서」에 따른 것)
- 2월 丁巳일(5일), 사마소를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
「삼국지」고귀향공기를 기본축으로 해서,「진서」,「자치통감」등 기사들을 함께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정원2년(255년) 1월 12일(乙丑), 관구검, 문흠의 반란 → 25일(戊寅), 정토하기 위해 사마사 출병. [30일(癸未), 곽회 죽음] → 윤1월 1일(甲申), 사마사가 은교에 주둔 (진서, 자치통감) → 16일(己亥), 낙가전투와 문흠 패주 → 한편, 9일(壬辰) 오나라 손준이 수춘으로 출병하였다가 문흠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19일(壬寅), 탁고(橐皋)로 진군하자 문흠이 군영으로 와서 투항. (삼국지 오서 삼사주전) → 21일(甲辰), 안풍진 도위부의 백성 장속이 관구검을 베고 그 목을 경도로 보냄. → 29일(壬子), 사마사가 허창에서 죽음 (진서에서는 辛亥=28일.)
관구검의 아들인 관구전(毌丘甸)은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였는데 앞서서 관구검이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 꾸미는 것을 알고 몰래 가속(家屬)들을 빼내어 거느리고는 신안(新安,홍농군 신안현)의 영산(靈山) 위로 달아났다. 이를 따로 공격하여 격파하고 관구검의 삼족을 멸했다. [1]
[1] 「세어世語」왈, 관구전(毌丘甸)은 자(字)가 자방(子邦)이고 경읍(京邑,경도)에서 명성이 있었다. 제왕(齊王,조방)이 폐위되자 관구전이 관구검에게 말했다,
“대인(大人)께서 방옥(方獄)의 중임(※진동장군으로 한 방면을 맡아 도독하는 임무를 비유)을 맡고 있으니, 나라가 기울이지고 무너지는데 안연(晏然,편안)히 스스로 지키고만 있으면 장차 사해(四海,천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관구검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대장군(→사마사)이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였는데(꺼렸는데) 관구검이 거병하게 되자 굴염(屈[冉+頁]=屈髥)(※)의 소재를 물어보고는 (관구전이 관구검과 함께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말하길, (관구검이) 오지 못할 것이고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거라고 하였다. 관구검이 처음 거병하여 아들인 관구종(毌丘宗) 등 4명을 오나라로 들여보냈다. 태강(太康: 晉무제 280-289) 중 오나라가 평정되자 관구종의 형제가 모두 중국(中國)(→진나라)으로 되돌아왔다. 관구종(毌丘宗)은 자(字)가 자인(子仁)으로 검소한 기풍이 있었고 (관직이) 영릉태수에까지 이르렀다. 관구종의 아들 관구오(毌丘奧)는 파동감군(巴東監軍), 익주자사를 지냈다.
/ 습착치(習鑿齒)가 말했다, “관구검은 (위나라) 명제(明帝)의 고명(顧命)에 감읍한 까닭에 이 싸움을 치르게 되었다. 군자라면 관구검의 일이 비록 이루어지진 못했으나 가히 그를 충신(忠臣)이라 이를 수 있으리라. 무릇 절의를 다하고 의로운 일에 나서는 것은 나(我)에게 달려있고 그 일을 이루거나 실패하는 것은 시세(時)에 달려 있는 법이다. 나에게 만약 시세(時)가 맞지 않다면 어찌 반드시 그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내가 반드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잊는(개의치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옛 사람이 이르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그에게) 산 자가 부끄럽지 않다(不愧)’ 하였는데, 관구검과 같다면 가히 ‘부끄럽지 않다(不愧)’ 이를만 하구나.
※ 屈[冉+頁](굴염) - 뒷 글자는 髥(구레나룻 염)의 이체자인데 워드로 표기가 안돼서 파자해서 적었습니다.(冉+頁) 중화서국본에서 고유명사로 표기되어 있고 문맥상 관구전을 가리키는데, ‘굽은 구레나룻’이란 뜻으로 볼 때 신체특징을 딴 별명이나 그를 비하해서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문흠(文欽)이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가니 오나라에서 문흠을 도호(都護), 가절(假節), 진북대장군, 유주목(幽州牧), 초후(譙侯)로 삼았다. [1]
[1] 문흠(文欽)이 오나라에 항복하며 표(表)를 올려 말했다, “품명(稟命)이 불행하여 늘 위국(魏國)에 예속하여 하늘에 의해 양쪽으로 끊어졌습니다. 비록 구석의 도시에 엎드리더라도 스스로 어찌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마사(司馬師)가 도천작역(滔天作逆)하여 두 임금을 폐위하여 해쳤으니(廢害二主) (※) 신(辛,상나라 주왕), 계(癸,하나라 걸왕), 고(高,???), 망(莽,왕망) 같은 악인이라도 족히 비유될 바가 아닙니다. 저 문흠이 누대에 걸쳐 위나라의 은혜를 받아 오조지정(烏鳥之情,까마귀가 반포反哺하며 어미새의 길러준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내심 분용(憤踊,분격)하는 마음을 품고 재삼지의(在三之義,군君,사師,부父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로 죽기를 바랐습니다. 전에 관구검(毌丘儉), 곽회(郭淮)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함께 사마사(司馬師)를 쳐서 흉얼(凶孽,반역자)을 쓸어없애고자 하여 실로 신이 루루(慺慺,정성스러운 모양)하게 맡은 바를 관장했으나 지려(智慮,지모와 사려)가 천박(淺薄)하여 미미한 절의나마 펼치지 못하니 나아가 의지할 바가 없어 비통함이 가슴을 끊는듯 하였습니다. 물러나 생각해보건대 본조(本朝)(→위나라)를 부익(扶翼,부축하고 도움)할 수 없고 부끄러움을 품은 채 면앙(俛仰,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봄)하니 스스로 몸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옛 의(義)를 빌미로 삼아 실로 귀의할 곳이 있어 천위(天威)를 빌려 만에 하나 뜻을 펼칠 수 있다면 죽는 날에 이르러 또한 한스러울 바가 없을 것입니다. 곧바로 서로 이끌고 거느리며 성화(聖化)에 귀명(歸命,귀순)하나 구차한 삶을 부끄럽게 탐하는 것은 (제가) 진술하는 바가 아닙니다 (???) 삼가 위나라로부터 받은 사지절(使持節), 전장군(前將軍), 산상후(山桑侯)의 인수(印綬)를 바쳐 올립니다. 표(表)를 올리며 황혹(惶惑,두렵고 당혹함)하고 엎드려 죄주(罪誅,치죄)되기를 기다립니다.”
※ 廢害二主(폐해이주) / 삼국지집해
: 하작(何焯,청) 왈, 이 표(表)는 후대인의 위작(僞作)이다. (이때 문흠이) 고귀향공(高貴鄕公)이 사마소에게 시해당한 일을 어찌 알아서 ‘두 임금(二主)’(을 폐위하고 해쳤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何焯曰 此表後人僞作高貴鄕公之弑昭事也 何得預言二主乎) / 폐위하여 해친 二主는 제왕 조방과 고귀향공 조모를 말하는 것일텐데, 고귀향공 조모는 이때 당시의 황제이고 5년 뒤인 260년에 사마소에 의해 시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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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毌丘儉)은 자(字)가 중공(仲恭)이고 하동(河東) 문희(聞喜) 사람이다.
부친인 관구흥(毌丘興)은 황초(黃初: 위문제 조비 220-226년) 중에 무위태수(武威太守)를 지내며 반란자는 치고 복종하는 자는 어루만져 하우(河右=하서,황하 상류의 서쪽으로 무위,주천 등 당시의 북서쪽 최변경 지역을 가리킴)를 개통(開通)하니 그 명성이 금성태수(金城太守) 소칙(蘇則)에 다음갔다. (주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적(賊) 장진(張進)과 배반한 호(胡,흉노;북방민족 통칭)를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고양향후(高陽鄕侯)에 봉해졌고 [1] (조정으로) 들어와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1] (진수陳壽의)「위명신주魏名臣奏」에 실려있는 옹주자사(雍州刺史) 장기(張既)의 표(表) – “하우(河右=하서河西)가 아득히 멀고 상란(喪亂)이 오래되었고 무위(武威)는 여러 군(郡)의 도로와 요해처에 닿아 있는데다 또한 민이(民夷,중국백성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며 여러 차례 병난(兵難)을 겪었습니다. 영(領) 태수(太守) 관구흥(毌丘興)이 관직에 부임하여 안으로는 관리와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밖으로는 강(羌), 호(胡)를 품어 끝내 유순하게 귀부시키며 관리로서 힘써 효험이 있었습니다. (주천의) 황화(黃華), (장액의) 장진(張進)이 처음 역란(逆亂)을 도모해 좌우를 선동(扇動)하였으나 관구흥은 지기(志氣,의지와 기개)가 충렬(忠烈)하여 난에 임해 뒤돌아보지 않고 장교(將校), 민이(民夷)들에게 화복에 관해 진술하여 그 말을 하며 체읍(涕泣,눈물흘리며 슬피 욺)했습니다. 당시 남녀 1만 명이 모두 감격하여 형체를 훼손하고 머리털을 흩트린 채 목숨을 바칠 것을 성심으로 맹세했습니다. 뒤이어 정병(精兵)을 이끌고 장액(張掖)을 축협(踧脅,위협)해 (장액)태수 두통(杜通)과 서해태수(西海太守,건안 말 장액군 북쪽에 있는 거연현에 새로 서해군을 설치해 거연택 일대를 관할하게 함) 장목(張睦)을 구원하여 거느렸습니다. 장액군의 번화(番和), 여간(驪靬) 두 현(縣)의 관리, 백성들과 (장액)군(郡)의 잡다한 호(胡)가 악인(→장진)을 저버리고 관구흥에게 나아오니 관구흥이 이들을 모두 안무하고 농사에 힘쓰게 했습니다. 관구흥이 매번 거치는 곳마다 성심으로 진력했으니 실로 나라의 좋은 관리(良吏)입니다. 전하(殿下)가 즉위해 만기(萬機,제왕의 정무)에 유념하시어 가는 털과 같이 작은 선행에도 필히 상록(賞錄)을 내리시니, 신이 엎드려 성지(聖旨)를 좇아 그에 관한 일을 진술합니다.”
※ 220년 하서에서의 장진, 황화 등의 반란 - 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서평에서 국연(麴演)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금성태수 소칙에게 토벌되어 항복합니다. 그 뒤 위왕을 이어받은 조비가 양주(涼州)를 처음 설치해 추기(鄒岐)를 자사(刺史)로 파견하자 국연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장액군의 장진(張進), 주천군의 황화(黃華) 등도 모반해 서로 호응하는 한편, 무위의 세 종족의 胡가 무위군 일대를 침범해 도로를 끊는데, 금성태수 소칙, 장군 학소 등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진병해 胡를 격파하고 무위태수 관구흥을 구원한 뒤, 계속 진격해 그해 5월에 하서지방을 다시 평정합니다. (문제기, 장기전, 소칙전)
※ 중국 북서쪽 지방의 주(州) 변천 (서쪽 → 동쪽)
[후한] 양주 – 사예(장안 등 삼보)
[후한 헌제 194년, 옹주 분립] 옹주(하서 4군) – 양주(농서) – 사예(삼보)
[213년, 구주제 부활] 모두 옹주로 통합
[220년, 조조 죽고 조비가 위왕 즉위 후 양주분립] 양주(하서) – 옹주(농서. 아래 ※) – 사예(삼보)
※ 「진서」지리지에서는 위문제 때 옹주를 분할해 (하서에 양주를 설치하고) 농우(농서)에는 진주(秦州)를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고 하는데 秦州의 경우는 정확히 220년 이때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기,전을 꼼꼼히 다 살피지는 못했으나 당시 옹주자사인 장기가 221년 양주자사로 전임할 때까지 별다른 관직 변경기록이 없는걸 볼 때 이때는 옹주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관구검(毌丘儉)이 부친의 작위(→고양향후)를 물려받았고 평원후(平原侯)의 문학(文學)이 되었다. (※)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상서랑(尙書郎)에 임명되었다가 우림감(羽林監)으로 올랐다. (명제가) 동궁(東宮,태자)일 때부터의 오랜 교분으로써 매우 친대(親待)를 받았다. (외직으로) 나가 낙양(洛陽) 전농(典農)이 되었다. 당시 (명제가) 농민들을 취해 궁실(宮室)을 짓자 관구검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신이 생각건대 천하를 위해 급히 제거해야 할 것은 두 적(賊)(→촉, 오)이고 급히 힘써야 할 것은 의식(衣食,입을것과 먹을 것)입니다. 실로 두 적(賊)이 멸해지지 않은 채 (내버려두고) 사민(士民)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한다면 비록 궁실(宮室)을 아름답게 꾸민다 해도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올랐다.
※ 평원후 문학(平原侯文學) / 노필(盧弼)의「삼국지집해」
: <명제기>에 의하면 황초3년(222년)에 (명제 조예가) 평원왕(平原王)이 되었으니 관구검은 (평원후가 아닌) 평원왕의 문학이 되었다. 이 때문에 아랫글에 ‘동궁 때부터 오랜 교분이 있어 매우 친대를 받았다’는 말이 있는 것이며, 조식(曹植)이 봉해진 평원후(平原侯)가 아니다. 이 관구검전의 侯자는 王자의 오기이고 (평원후X 평원왕O) 관구검은 (평원후문학을 물려받은게 아니라) 부친인 관구흥의 작위인 고양향후를 물려받았다. (明帝紀黃初三年爲平原王 儉爲平原王文學 故下文有以東宮之舊甚見親待之語 非曹植所封之平原侯也 此傳侯字當爲王字之誤 儉襲父興爵高陽鄕侯.) / <儉襲父爵爲平原侯文學>를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평원후(문학)가 되었다’(부친의 작위=평원후)로 읽기도 하는데, 그렇게 읽으면 文學이 해석에서 빠져버리며 앞 문장에서 보듯 관구흥의 작위는 평원후가 아니라 고양향후입니다. 평원후문학은 작위가 아니라 관직명이므로(張舜徽 등의「삼국지사전」평원후문학(平原王文學) 항목에서는 “관직명. 제후왕의 속관이며, 문학연文學掾이 있었다.”고 해설) 儉襲父爵/爲平原侯文學 로 끊어서 별개의 문장으로 읽는게 맞겠죠. 노필의 설명도 이런 취지입니다. 그리고, 조식이 평원후를 지낸 것은 건안16년(211년) – 건안19년(214년)이므로 ‘평원후’라는 말은 역시 이상하고, ‘평원왕’의 오기로 보는게 맞다 생각됩니다. 즉, ‘조예가 태자가 되기 전 평원왕일 때(황초3년- 황초7년) 관구검이 그의 속관으로 봉직하며 친분을 쌓았고 이를 연고로 조예가 황제가 된 뒤 중용되었다.’ <- 대략 이런 취지의 얘기를 한 것입니다.
청룡(靑龍: 위 명제 233-236) 중 황제가 요동(遼東) 토벌을 꾀하니 관구검에게 간책(幹策,재간과 모책)이 있다 하여 그를 (기존의 형주자사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옮기고 도요장군(度遼將軍), 사지절(使持節),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의 직을 더했다. (경초景初 원년인 237년) 유주(幽州)의 제군(諸軍)을 이끌고 양평(襄平,요동군 양평현)에 도착해 요수(遼隧,양평의 남서쪽 지명.공손도전 참조)에 주둔했다.
우북평(右北平) 오환(烏丸)의 선우(單于) 구루돈(寇婁敦), 요서(遼西) 오환의 도독 솔중왕(都督率衆王)(※) 호류(護留) 등 지난 날 (조조가 요서를 정벌할 때) 원상(袁尙)을 뒤쫓아 요동(遼東)으로 달아난 자들이 무리 5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구루돈(寇婁敦)이 동생 아라반(阿羅槃) 등을 보내 궐(闕)로 나아와 조공(朝貢)하게 하니 그 거수(渠率=渠帥.수령,군장) 20여 명을 봉해 후(侯), 왕(王)으로 삼고 각기 차이를 두어 수레와 말(馬), 견직물과 채색비단을 하사했다. 공손연(公孫淵)이 역격해 관구검과 싸우니 (관구검이) 불리하여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듬해(경초2년=238년), 황제가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보내 중군(中軍,중앙군)과 관구검 등의 군대 수만 명을 통수하게 해 공손연을 쳐서 요동을 평정했다. 관구검이 그 공으로 안읍후(安邑侯)로 올려 봉해져 식읍이 3,900호에 달했다.
※ 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 (요서오환도독솔중왕호류)
: 솔중왕(率衆王)은 후한 때 오환, 선비 등의 군장을 회유하기 위해 내리던 관작의 명칭으로 흔히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호류(사람이름임)의 관작명이 요서오환의 도독 + 솔중왕…인 것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명제기>에서 같은 사건을 기술하며 遼西烏丸都督王護留(요서오환도독왕호류)로 적은걸 볼 때 ‘부중들을 도독하며 이끄는 왕’ 정도의 뜻으로 ‘도독솔중왕’ 자체가 왕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오환선비동이전> 배송지 주에 인용된「위략」에서는 ‘호류(護留)’를 ‘호류엽(護留葉)’으로 적고 있습니다. (魏略曰:景初元年秋, 遣幽州刺史毋丘儉率衆軍討遼東. 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葉, 昔隨袁尙奔遼西, 聞儉軍至, 率衆五千餘人降. 寇婁敦遣弟(阿羅奬)[阿羅槃]等詣闕朝貢, 封其渠帥三十餘爲王, 賜輿馬繒采各有差. / 오환선비동이전 주 위략) 삼국지 이 대목과 내용이 거의 똑같은걸 볼 때 진수가「위략」을 참조해서 이 대목을 기술했고, 두 책이 각각 전해지는 과정에서 글자가 와전되어 차이가 생긴 것 같습니다. 구루돈의 동생 아라반(阿羅槃)의 경우에도「위략」에는 아라장(阿羅奬)으로 다르게 적혀 있는데,「삼국지」중화서국본에서는 관구검전 위 대목에 의거해서「위략」의 ‘아라장’을 ‘아라반’으로 고쳤습니다. (중화서국 점교본에서는 교감을 통해 삭제한 글자는 (), 추가한 글자는 []로 표시함)
정시(正始: 제왕齊王 조방曹芳 240-248) 중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킴)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梁의 음은 渴)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 수천명을 참획했다.
※ 구려왕 궁(宮) - 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조에서는 관구검 침공 당시 고구려왕의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하고 이를 줄인 형태로 궁(宮)이란 표기와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位宮이라고 표기하려 했다면 뒤에서는 줄여 쓴다 하더라도 (位가 성이 아니고 位宮 전체가 이름이라는 것을 진수도 알고 있으므로 宮이라 줄이는 것도 엄밀히는 잘못된 것임) 이 권에서 처음 나올때는 완전하게 적어야되는데 그냥 宮이라 한 것은 잘못된 표기입니다. 한편,「삼국사기」에 의하면 관구검침공 당시의 고구려왕은 11대 동천왕(東川王)이고, 동천왕의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어릴때 이름은 교체(郊彘)라 한 반면, 동천왕의 부친인 10대 산상왕(山上王) 연우(延優)의 다른 이름을 位宮이라 적고 있습니다. 위궁을 동천왕이 아닌 산상왕에 연결한 것은 삼국사기의 오류로 보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편 참고.
※ 비류수(沸流水) / 삼국지집해
: 「일통지」에 의하면 비류강(沸流江)이 조선(朝鮮) 강동군(江東郡) 남쪽(지금의 평양 동쪽임)에 있는데 한강으로부터 나뉘어 흐르다 서쪽으로 대동강에서 합해진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건대, 비류수(沸流水)는 응당 지금의 압록강일 것이다. 그에 관한 설명은 본지 동이전을 보라. (一統志 沸流江在朝鮮江東郡南自漢江分流西合於大同江 弼按沸流水當卽今鴨綠江 說見本志東夷傳.) / 대동강 지류인 비류강은 지금도 존재하고 이무렵 사서에 나오는 초기고구려의 비류수와는 별개의 강입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지명을 가지고 온 케이스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쨌든 위 기사에 나오는 것과 같은 초기고구려의 ‘비류수’는 ‘압록강 지류인 지금의 혼강(渾江 : 佟佳江) 이나 그 지류인 부이하(富爾河) 유역의 환인현(桓仁縣) 일대’로 비정됩니다.(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광개토왕릉비 편 각주 참고)
※ 양구(梁口) -「삼국지집해」에서 신하(新河), 웅진강구, 열구, 태자하 등 여러 설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옮기려니 좀 막막해서 -_-; 그냥 생략합니다. 梁口 = (大)梁水의 口 즉, 지금의 태자하(太子河)나 그 지류 어디쯤이고, 위 기사의 정황을 보아 비류수와 만나는 지점일 수 있습니다. 한편「삼국사기」에는 양맥(梁貊)(나라나 부족이름)이나 양맥곡(梁貊谷)(지명)이란 명칭이 종종 등장하는데(동천왕이 서전에서 비류수에 이어 양맥곡에서 관구검을 격파했다 하여 이 관구검전 대목과 연결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그 위치를 동가강(佟佳江)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과의 합류지점인 지금의 부이강 하구로 추정하거나, 대량수(大梁水)가에 있었던 맥족(貊族)에 대한 명칭으로 해석하여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 屠句驪所都 (도구려소도) / 삼국지집해
: 「북사」(권94) 고구려전에 의하면, 정시5년(244년)에 유주자사 무구검(毋丘儉,관구검毌丘儉의 다른 표기)이 현도를 나와 위궁(位宮)을 치고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우니 (위궁이) 패주했다. 무구검이 이를 추격해 혁현(䚂峴, 혁 고개)에 이르러 [※태평어람에는 赬(붉을 정) 통전에는 頳(=赬.붉을 정)으로 표기.중국정사조선전 북사 편 교감기 25번 참고]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丸都山)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태평)「환우기」권173에 의하면, 관구검이 (위궁을) 추격하여 적현(赤峴, 적 고개)에 이르렀고 현거속마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참수했다. (독사)「방여기요」권38에 의하면, 환도성(丸都城)은 비류수(沸流水)의 동쪽에 있었다. [※독사방여기요(청나라 때 저작임) 권38 山東 九는 외국지리를 고증하는 대목으로 조선 경기도 조의 환도성 항목에서 왕경(=서울)의 동북쪽 운운하는 엉뚱한 얘기는 있으나 인용문과 같은 대목은 없습니다. 출전을 잘못 적은거 같습니다.] (北史 高句麗傳 正始五年 幽州刺史毋丘儉出玄菟 討位宮 大戰于沸流 敗走 儉追至䚂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寰宇記卷百七十三儉追至赤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斬首萬餘級. 方輿紀要卷三十八 丸都城在沸流水之東.)
구려(句驪)의 패자(沛者)로 그 이름이 득래(得來)인 자가 있어 수차례 궁(宮)에게 간언했으나 [1] 궁(宮)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봉호(蓬蒿,쑥)가 자라나는 꼴을 곧 보겠구나.”
그리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온 나라에서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에 명해 그의 묘(墓)를 허물지 않고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처자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1] 신 송지(松之,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가 보건대 (권30)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패자(沛者)는 구려국(句驪國)의 관직 이름이다.
궁(宮)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正始)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2]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2]「세어世語」(晉 곽반郭頒의 위진세어) 왈, 왕기(王頎)는 자(字)가 공석(孔碩)이고 동래(東萊) 사람이다. 진(晉)나라 영가(永嘉: 회제 307-313) 중 (낙양을 공격해 진나라 회제를 포획한) 대적(大賊) 왕미(王彌)가 왕기(王頎)의 손자이다.
※ 매구(買溝) / 삼국지집해
: 심흠한(沈欽韓, 청淸) 왈, (삼국지 권30) 동이전(동옥저 조)에서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여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漊)라 하며(중화서국본에는 置溝婁로 표기) 이는「후한서」동이전(동옥저 조)에서도 같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조에 의하면) 구루(溝漊)는 구려(句麗,고구려)에서 성(城)을 가리키는 이름이라 했으니 이는(→위에서 買溝라 한 것은) 置를 買로 잘못 적은 것이며 또한 漊 자가 탈락된 것이다. (沈欽韓曰 東夷傳北沃沮一名置溝漊 後漢書東夷傳同 溝漊者 句麗名城也 此誤置爲買 又脫漊字.) / 심흠한은 위의 買溝(매구)를 置溝婁(漊)(치구루, 즉 북옥저)의 오기로 본 것입니다.(매구X, 치구O) 내용을 볼 때 관구검전의 買溝(매구)와 동옥저 조의 置溝漊(치구루)는 서로 같은 것으로 북옥저를 가리킨다는 설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 영락20년 조 동부여정벌기사에 나오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의 ‘미구루(味仇婁)’를 관구검전의 買溝와 같은 실체로 보는 설이 있고(노태돈.한국고대금석문 역주 참고), 또「삼국사기」에 매구곡(買溝谷)이란 지명이 등장하는 걸 볼 때(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 삼국사기 권14 대무신왕 13년 조), 거꾸로 置溝(치구)를 買溝(매구)의 오기로 보는게 더 맞지 않을까 합니다. (치구X 매구O) [買溝(漊)(관구검전) = 置溝(漊)(동옥저전. 買溝의 오기?) = 味仇婁(광개토왕릉비) = 買溝谷(삼국사기) = 북옥저(나 그에 속한 소국이나 지역명)]
cf.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삼국사기」의 매구곡을 호동왕자 낙랑국의 전설이나 매소홀(인천), 매성(양주) 등의 지명에 비추어 중북부지방의 지명 등으로 추정했는데, 그보다는 이 관구검전의 買溝와 같은 것, 즉 북옥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삼국사기」의 최리 낙랑국에 관해 평양이 아니라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했다가 서기30년 동부도위 폐지 이후 실질적으로 자립한 이른바 영동7현의 재지세력들이 낙랑국을 자칭했거나 대외적으로 그렇게 인식되었다는 설이 있는데(임기환「고구려와 낙랑」), 대무신왕대 고구려의 팽창과정-특히 옥저, 동예의 복속- 와중에 언급되는 買溝는 관구검전의 買溝와 같은 것으로 북옥저의 소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 (과옥저천유여리 지숙신씨남계 각석기공 간환도지산 명불내지성)
: ‘옥저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 남계에까지 이르렀고 / 刻石紀功 하여 환도산과 불내성에 刊銘했다’는 식으로 읽는게 더 맞지않나 싶은데(즉, 각석기공한 것은 환도산, 불내성의 2개), 의미단락을 분명히 구분해서 서술한 북사, 양서, 통전, 자치통감, 삼국사기 등의 다른 사서 기록들을 고려해 위에서처럼 풀었습니다. (예를 들어「북사」고구려전은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자치통감」은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而還,所誅ㆍ納八千餘口.”) 그리고, 이 중 ‘환도산에 刊했다’는 것이 1906년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로 보입니다. (한편, 중국정사조선전 북사 편에서는 위 문장을 “또 丸都山을 깍아서 不耐城이라 새겨두고 돌아왔다.”로 풀었습니다. 환도산=불내성이란 전제에서 刊銘한 것이 2개가 아니라 하나이고, 불내성에 새긴 것이 아니라 ‘불내성’이란 명문을 남겼다는 뜻의 풀이인데, 이미 발견된 관구검기공비가 있으므로 이렇게 볼순 없겠죠.)
※ 옥저와 숙신 / 삼국지집해
: 옥저에는 둘이 있었으니 그 하나가 동옥저(東沃沮)라 하며 또한 남옥저(南沃沮)라고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북옥저(北沃沮)라 하며 남옥저로부터 8백여 리 떨어져 있었다. 불내성(不耐城)은 동옥저가 거처하던 곳으로,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서 동옥저에 이르고 또한 추격하여 북옥저에 이른 것이다.「일통지」에 의하면, 옛 옥저 땅은 지금의 조선 동북쪽 경계이고 불내성(不耐城)은 지금의 조선 함흥부(咸興府) 북한현(北漢縣)에 있었다. (한나라때) 낙랑군에 속했고 동부도위가 이곳을 다스렸다.(동부도위의 치소였다) 반고의 한서지리지의 낙랑군 불이(不而)현이 즉 이것이다. 而(이)와 耐(내)는 옛 글자에서 서로 통했다. (不而=不耐 라는 말) 호삼성(胡三省,원元) 왈, 위나라 때 동이(東夷)의 읍루국(挹婁國)이 즉 예전의 숙신씨(肅愼氏)다. (沃沮有二 一曰東沃沮 亦曰南沃沮 一曰北沃沮 去南沃沮八白餘里 不耐城東沃沮所居也 儉征高句麗至東沃沮 又追至北沃沮也. 一統志古沃沮地今朝鮮東北境 不耐城在今朝鮮咸興府北漢縣 屬樂浪郡東部都尉治此. 班志樂浪郡不而卽此 而耐古字通 胡三省曰 魏東夷挹婁之國卽古肅愼氏也.)
※ 불내(不耐) / 국사편찬위윈회 중국정사조선전 삼국지 편의 역주
: 『漢書』「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불내예로 비정되는 함경도)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위 관구검전 대목을 제가 풀이한 것처럼 丸都山에 刊하고 不耐城에 銘했다..로 읽고, 전자는 이미 발견된 관구검기공비이나 후자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의 實例이다.
※ 관구검 기공비 /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인용.
(판독문)
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復遺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巍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侯▨」行裨將軍領▨」▨裨將軍」
(번역)
정시(正始) 3년(242년)에 고구려(高句驪)가 반(反)하자,
7장군(將軍)을 거느리고 구려(句驪)를 토벌하였다. 5(年에;244)
(고구려가) 다시 구략(寇略)하자, (토벌하고) 6년 5월에 (군사를) 돌이켰다.
討寇將軍 巍烏丸單于▨ 토구장군 외오환선우X
威寇將軍 都亭侯▨ 위구장군 도정후X
行裨將軍領▨ 행비장군 령X
▨裨將軍 X비장군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참고) 위 한국고대금석문의 번역은, 3행에서 ‘(고구려가) 유구(遺寇,침범)하는데 (관구검이) 6년 5월에 회군했다’하는게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중간에 ‘(관구검이) 토벌하고’란 말을 추가해서 풀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건 결락된 부분이 아님에도 문장 하나를 임의로 집어넣어 풀이한 셈이고 관구검전 기사에 따라 짜맞춘 느낌도 듭니다. 비문의 아랫부분이 깨져있어서 각 행의 뒷부분에 몇자가 더 있었는지를 알 수 없고(비문 이미지는 위 링크 참조), 이에 관련해서 2행 뒤에 年一無 등의 글자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에 따르면 ‘정시 3년에 고구려가 反하자 (관구검이) 7아문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고 (정시) 5년에 (고구려가 일체) 다시 침범하는 일이 (없으므로) 정시 6년 5월에 회군했다’로 풀이됩니다. 전체문맥상 이렇게 無 등의 부정어가 누락된 형태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 합니다.
※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에 관련된 기록 정리 (원문은 중국정사조선전에서 인용)
①「삼국지」권4 <삼소제기>(제왕 조방)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정시)7년(246년) 봄 2월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고, 여름 5월에 예맥(濊貊)을 쳐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② 권28 <관구검전>
: 위에서처럼 정시 연간 1차 정벌[고구려 도읍을 도륙하고 동천왕 패주], 정시6년(245년) 2차 정벌[다시 공격하자 동천왕은 매구로 도주, 이를 추격하여 옥저를 지나 숙신씨 남계에까지 이름]로 서술.
③ 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조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爲幽州刺史毌丘儉所破. 語在儉傳.
정시3년(242년)에 (고구려의) 궁(宮)(→동천왕)이 서안평을 침범하였고 정시5년(244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 말은(이와 관련된 얘기는) 관구검전에 있다.
cf. 「삼국지집해」에서 노필(盧弼)은 삼소제기와 관구검전 등에서 연대가 서로 다른 것을, 정벌전의 시작을 정시 5년, 마무리된 것을 정시 7년으로 추정하였음.(儉傳, 正始中, 儉督諸軍, 討高句驪. 六年, 復征之. 齊王紀, 七年, 儉討高句驪, 破之. 蓋用兵數年, 此傳記其始, 齊王紀記其終也.)
④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 조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恆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남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고…(중략)…왕기(王頎)가 따로 군대를 보내 궁을 뒤쫓아 공격하여 그(→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⑤「양서梁書」권54 동이열전 고구려 조
正 始三年, 位宮寇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 位宮將步騎二萬人逆軍, 大戰於沸流. 位宮敗走, 儉軍追至峴, 懸車束馬, 登丸都山, 屠其所都, 斬首虜萬餘級,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정시3년(242년), 위궁(位宮)이 서안평을 침범했다. 정시5년(244년), 유주자사 무구검(毋丘儉,관구검의 다른 표기)이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가 위궁(位宮)을 쳤다. 위궁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무구검)군을 역격하여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주하니 무구검군이 추격하여 현(峴,고개)에 이르러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참획하였고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6년(245년), 무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황급히) 제가(諸加)를 거느린 채 옥저로 달아났고 무구검이 장군 왕기(王頎)를 시켜 이를 추격하게 하여 옥저를 가로지르며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다.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글자를 새기고 돌아왔다.
⑥「북사北史」권94 고구려전
正 始三年, 位宮寇遼 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 討位宮, 大戰於沸流. 敗走, 儉追至䚂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
정시3년(242), 위궁(位宮)이 요(동) 서안평을 침범했다. (정시)5년(244), 유주자사 무구검이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가 위궁을 쳐서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우니 (위궁이) 패주했다. 무구검이 추격하여 혁현(䚂峴,혁 고개)에 이르고 현거속마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위궁이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6년(245), 무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황급히) 제가(沃沮)를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무구검이 장군 왕기(王頎)를 시켜 이를 추격하게 하니 옥저를 가로지르며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각석기공하였다. 또한 환도산에 刊하고 불내성에 銘한 뒤에 돌아왔다.
(cf.「통전」변방전 고구려조 기사는 위의 양서나 북사 기사와 거의 똑같으므로 생략합니다.)
⑦「삼국사기」권17 동천왕 20년(246년) 조
: 중국측 기록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우리의 고유한 전승기록을 수록해서 상당히 다른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체원문과 번역문은 디지털한국학 참조)
<<동천왕 20년 (246년, 위나라 정시7년) 가을 8월, 관구검 1만 군사로 침범 – 보기 2만으로 비류수 가에서 역격해 고구려가 이기고 3천여 급 참수 – 양맥곡(梁貊谷)에서 다시 싸워 3천여 급 참획 – 위나라 군대를 얕잡아보고 공격하다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항전하자 1만 8천여 명이 죽는 등 대패, 동천왕은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남 –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하고 왕기를 보내 동천왕을 추격 – 동천왕이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러 밀우, 유유 등의 활약으로 위기를 면함 – 위나라의 각석기공과 득래 일화 추가(관구검전 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보임) >>
일단 위의 노필(삼국지집해)의 설처럼 관구검의 첫 원정이 시작된 건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라 대략 정시 5년(244)이고, 정시 7년(246)이라고 한 <삼소제기>는 예맥 격파를 포함해 전체 원정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중앙 조정에 보고되거나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포상이 행해진 시점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삼국사기」의 경우는 우리측 고유사료와 중국측 기록이 서로 배치될 경우는 대체로 우리측 기록이나 또는 더 풍부한 쪽의 기사에 따랐는데, (내용전개에 관해서는 우리측 기록이 상세했으나) 기년에 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거나 불명확해 연도에 관한 한 <삼소제기>나「자치통감」등을 참고해 동천왕 20년(정시 7년) 조에 수록한 것으로 보입니다.「삼국지」관구검전이나「양서」등 중국측 기록에 따라 1차, 2차로 나눠서 보는게 일반적인 거 같은데, 좀더 상세한「삼국사기」의 기술대로 전체를 일련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가령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시3년(242) 동천왕의 요동 서안평 공략 - 정시 5년(244) 8월, 관구검 침공 개시 – 고구려가 서전에선 승리했으나 결국 대패하고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주 – 10월, 환도성 함락하고 왕기를 보내 동천왕 추격(이게 이른바 2차 침공이고 이때 관구검은 환도성 근처에서 머물며 겨울을 나거나 되돌아 감?) – 왕기와 휘하 군대가 동옥저 공격 – 밀우, 유유 등의 활약으로 위기 모면 – (동천왕 소재를 추적하기 위해 군사를 나누었거나 동천왕이 북옥저로 다시 도주했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왕기군 북옥저 진격하여 숙신 남계에까지 이름 – 정시 6년(245) 5월, (관구검 포함 전군 또는 왕기군) 환군 (관구검기공비)
좌장군(左將軍) 가절(假節) 감예주제군사(監豫州諸軍事,예주의 제반 군무를 감독) 영(領,겸직의 의미)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올랐다가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전임했다. 제갈탄(諸葛誕)이 동관(東關,오나라와의 국경인 유수구 북쪽의 요새)에서 싸워 불리하자 이에 영을 내려 제갈탄과 관구검(의 임지와 관직)을 서로 바꾸니, 제갈탄이 진남(장군), 도독예주(都督豫州,예주 도독)가 되고 관구검이 진동(장군), 도독양주(都督楊州)가 되었다. 오나라 태부(太傅) 제갈각(諸葛恪)이 합비(合肥)의 신성(新城)을 포위하자 관구검이 문흠(文欽)과 함께 이를 막았고, 태위(太尉) 사마부(司馬孚,사마의의 동생임)가 중군(中軍)을 지휘해 동쪽으로 와서 포위를 풀자 제갈각이 퇴환했다.
※ 위나라 제갈탄 등의 남벌과 오나라 제갈각의 북벌 - 252년(가평嘉平 4년) 11월, 위나라 대장군 사마사(司馬師)의 주도아래 [249년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고평릉 사건) 보정대신으로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曹爽)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뒤 251년에 죽고, 그의 아들인 사마사가 이어받음] 왕창, 관구검, 제갈탄 등이 3갈래 방면에서 대대적으로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제갈탄이 동관에서 패하자 모두 퇴각함. / 253년 3월 오나라의 제갈각이 출병해 위나라의 신성을 포위했다가 함락하지 못하고 7월에 퇴각함. (오서 삼사주전, 위서 삼소제기, 자치통감)
당초 관구검(毌丘儉)은 하후현(夏侯玄), 이풍(李豊) 등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양주자사(揚州刺史) 전장군(前將軍) 문흠(文欽)은 (249년 사마의에 의해 숙청된) 조상(曹爽)의 읍인(邑人,동향인)으로, 효과추맹(驍果麤猛,용맹과감하고 거칠고 사나움)하여 수차례 전공을 세웠고 (적과의 전투에서의) 노획품을 부풀려 (보고하길) 좋아해 이로써 (조정의) 총상(寵賞,영총과 포상)을 구했으나 대부분 허락되지 않자 원한(怨恨)이 날로 심해졌다. 관구검이 이를 헤아려 문흠을 후대하여 두 사람의 우의가 돈독해졌고 문흠 또한 감격하여 (관구검을) 떠받들고 성심으로 대하며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
※ 하후현, 이풍 등은 당시 권신인 사마사에 대척하던 인물들로, 사마사에 의해 모반죄에 걸려 254년(정원正元 원년) 초에 숙청됩니다. 이 사건 등을 포함해 사마사의 전횡에 분을 품은 당시 황제인 조방(曹芳)이 사마사를 몰아내려다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는데, 이 낌새를 알아챈 사마사가 이해 9월에 조방을 제왕(齊王)으로 쫓아내고 10월에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曹髦)를 새 황제로 추대합니다.
정원(正元) 2년(고귀향공, 255년) 정월, 수십 장에 이르는 혜성(彗星)이 나타나 서북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오(吳), 초(楚)의 분야에서 떠올랐다. 관구검, 문흠이 기뻐하며 이를 자신들에게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다. 마침내 태후(太后)의 조서를 칭탁해 대장군 사마경왕(司馬景王,사마사司馬師)의 죄상을 적어 여러 군국(郡國)에 돌리고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로 주둔하던 회남(淮南)의 장수(將守,수비장)들을 위협하고 아울러 크고 작은 관리, 백성들을 모두 수춘성(壽春城)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성 서쪽에 제단을 만들고 삽혈(歃血,희생의 피를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는 것)하며 칭병(稱兵,거병)할 것을 맹세했다. 노약자들을 나눠 (수춘)성을 지키게 하고 관구검, 문흠은 스스로 5-6만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항(項,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렀다. 관구검은 (항현 성을) 굳게 지키고 문흠은 바깥에 있으면서 유병(游兵,유격병,기동부대)으로 활약했다. [1]
[1] 관구검(毌丘儉), 문흠(文欽) 등이 표(表)를 올려 말했다 –
“예전 상국(相國) 사마의(司馬懿)가 위실(魏室,위나라 황실)을 광보(匡輔,보필)해 대대로 섬기며 충정(忠貞)했으니 이 때문에 열조(烈祖) 명황제(明皇帝,위명제 조예)께서 (죽으며) 그에게 기탁(寄託)하는 임무를 주었고 사마의가 육력(戮力,진력;협력)하며 충절을 다해 화하(華夏,중국)를 안녕시켰습니다. 또한 제왕(齊王,폐출된 조방曹芳)이 총명하여 덕을 더럽히는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성심으로 부지런히 충성을 다하며 윗사람을 보필하니 천하가 이에 힘입었습니다. 사마의는 두 적(虜)을 토멸해 우내(宇內,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여 처음으로 군량(軍糧)을 나누었고 평정하는 날에 일제히 거병하려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제왕(齊王)은 사마의에게 자신을 보필한 큰 공이 있다 하여 이 때문에 사마사(司馬師)로 하여금 사마의의 업(業)을 승통(承統)하게 하고 대사(大事)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사마사(司馬師)는 성년(盛年)으로 재직하며 질병이 없으면서도 있다고 칭탁하여 강병(彊兵)을 끼고 앉아 신하로서의 예의를 차리지 않아 조신(朝臣)들은 그를 그릇되이 여기고 의사(義士)들은 그를 나무라 천하가 모두 이를 들어서 잘 아는 바이니, 이것이 그의 첫번째 죄입니다.
사마의(司馬懿)는 계획을 세워 적(賊)을 취하고자 하여 군량을 많이 찧어두고(준비해두고) (적을 공격할) 기한을 정했습니다. 사마사는 대신(大臣)으로서 국난을 제거하고 또한 자식으로서 부친의 업(業)을 완성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애성(哀聲,곡소리?)이 미처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내 이를 그만두어 신하로서 불충하고 자식으로서 불효했으니, 이것이 그의 두번째 죄입니다.
적이 물러나며 동관(東關)을 지나자 자신은 편안히 앉아 군사를 일으켜 삼정(三征,※)이 함께 진격하게 해 군사를 상하고 패적(敗績,대패)하고 여러 해에 걸쳐 충실히 해둔 군(軍)을 다 없애버려, 적이 쳐들어와 천하를 소동(騷動)케 하고 (백성들을) 죽거나 다치고 유리(流離,떠돌아다님.유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세번째 죄입니다.
적(賊)이 거국적으로 모든 군사를 동원해 50만이라 칭하면서 수춘으로 향해 오며 낙양으로 나아가려 꾀하자 때마침 태위 사마부(司馬孚)가 신 등과 더불어 계책을 세우니 이에 험요한 곳을 틀어막고는 그들과 더불어 쟁봉하지 않고 신성(新城)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습니다. 회남(淮南)의 장사(將士,장졸)들이 충봉리인(衝鋒履刃,적진을 부딪치며 칼날을 밟음)하며 밤낮으로 서로 지키고 백일동안 근췌(勤瘁,수고하고 지침)하여 죽은 자가 땅에 널릴 정도였으니, 위나라에 군(軍)이 있은 이래 위난으로 인해 심하게 고통받은 것이 이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 그러나 사마사는 자신의 마음대로 하여 (이들에게) 봉상(封賞)할 것을 논의하지 않고 권세(權勢)를 자유자재로 하여 봉상받거나 공이 기록된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네번째 죄입니다.
※ 하작(何焯,청) 왈, (오나라) 제갈각이 (253년 북벌하여) 비록 신성(新城)에서 꺾였으나 이 표를 보건대 또한 한때의 강대(强對,강적)였도다. (何焯曰 諸葛恪雖挫於新城 以此表觀之 亦一時之强對也. / 삼국지집해)
옛 중서령(中書令) 이풍(李豊) 등은 사마사(司馬師)에게 신하로서의 절의가 없다 하여 그를 물러나게 할 일을 의논하려 했습니다. 사마사가 이를 알아채고 이풍을 (오도록) 청하고는 그날 저녁에 때려 죽이고 시신을 실어내어 관에 넣어 묻었습니다. 이풍 등은 대신(大臣)이며 제왕(帝王)의 복심(腹心,측근,심복)인데도 (사마사가) 함부로 혹독하고 난폭한 짓을 가하였고 그를 죽이면서도 죄명(罪名)조차 없었으니 사마사에게 무군지심(無君之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다섯번째 죄입니다.
사마의는 (생전에) 늘 탄식하며 말하길, 제왕(齊王,조방)은 인주(人主,임금)의 지위를 스스로 감당할 만하고 군신(君臣)의 의(義)가 정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제왕 조방이) 직무를 섬긴 이래 열다섯 째 해에 이르러 처음으로 정무를 챙기고자 하여 무고(武庫,무기고)를 안행(按行)하고는 조서를 내려 금병(禁兵)들이 함부로 나가지 말도록 했습니다. 사마사는 간특한 짓을 하여 인신(人神)이 보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거짓으로 꾸며 군주(君主)를 폐출하며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사마부(司馬孚)는 사마사(司馬師)의 숙부로 그 성정이 심히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쫓겨나는) 제왕(齊王)을 뒤쫓아 전송하며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뭇 신하들이 모두 분노하였으나 사마사는 잔인한 마음을 품고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의 여섯번째 죄입니다.
또한 옛 광록대부(光祿大夫) 장집(張緝)을 죄없이 주살하고 그의 처자를 죽였고 아울러 모후(母后,황태후,황후 등의 총칭)에까지 화가 미쳐 지존(至尊)을 핍박하여 강제로 독촉해 내보내니 (※이 사건에 연루되어 폐출된 조방의 장황후가 장집의 딸임) 그 일이 닥쳤을 때 애악(哀愕,슬프고 놀람)하여 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사는 칭경(稱慶,축하함)하며 도리어 기뻐했으니, 이것이 그의 일곱번째 죄입니다.
폐하께서 제위에 올라 총명(聰明), 신무(神武)하시어 성심(聖心)으로 다스리고 성약(省約,간략함)을 숭상하고자 하니 천하가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사는 스스로 뉘우쳐 신하로서의 예의를 닦아 회복하지 않고, 바야흐로 군사를 불러모아 궁내(宮內)를 훼손하고 열후(列侯)로써 자신을 보위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했을 때 당초 (칭병하며) 조근(朝覲,조현)하지도 않다가, 폐하께서 친히 사마사의 집에 행차해 그의 병을 위문하려 하자 또한 이를 거절하며 통하지 않게 하고 법도(法度)를 받들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의 여덟번째 죄입니다.
근자에 영군(領軍) 허윤(許允)이 진북(장군)에 부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허윤이) 주전(廚錢,궤짝의 돈? 공금?)을 (함부로) 사여했다 하여(※<하후현전>에 의하면 관물을 낭비했다는 죄로 허윤이 진북장군 임지로 출발하기 전 체포되어 정위에 넘겨짐) 사마사가 이를 상주하여 고발해 형벌을 가하였고, 비록 (겉으로는) 유배형에 처한다고 말했으나 도로에서 굶겨 죽이니 천하에서 이를 듣고 애통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아홉번째 죄입니다.
세 방면의 (변경)수비가 하루 아침에 궐폐(闕廢)되고 정병(精兵)을 여럿 뽑아 이로써 자신의 영(營)을 보위하고 다섯 영(營)이 거느리는 군사에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않고 많은 기장(器杖,무기)을 실어내어 자신의 본영(本營)에 쌓아두니 천하에서 이를 듣고 사람들이 저마다 분원(憤怨)을 품었고 와언(譌言,유언비어)이 길에 가득차 해내(海內)를 의심에 빠뜨렸습니다. 이것이 그의 열번째 죄입니다.
많은 수비병들을 쉬게 하며 고제(高第,성적 우수자)를 (자신이) 차지하고 사표(四表,사방 끝,천하)를 공허하게 하여 강대한 권세를 함부로 휘두르고자 했고 간사한 마음을 왕성하게 하여 둔전(屯田)을 모아 차지하고 그들에게 다시 상을 내렸고 무력을 믿고 잔인하게 굴며 구법(舊法)을 파괴하고 어지럽혔습니다. 여러 번왕(藩王), 공(公) 들을 모아 업(鄴)에 기거하게 하며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고 하루 아침에 거사하여 임금을 내쫓았습니다. 하늘은 악을 기르지 않아 눈의 종기(目腫)가 다스려지지 않게 하였으니(使目腫不成???), 이것이 그의 열한번째 죄입니다.
신 등의 선인(先人,선조)이 모두 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조조曹操)를 수종하며 흉포한 이들을 정토(征討)하여 큰 공을 세웠고 고조(高祖) 문황제(文皇帝)(→조비曹丕)가 즉위하여 한나라의 선양을 받아 나라를 열고 가업을 계승하니 이는 요임금, 순임금이 서로 제위를 전한 것과 같습니다. 신이 안풍(安豊)의 호군(護軍) 정익(鄭翼)(※220년에 여강군을 갈라 안풍군 신설함), 여강(廬江)의 호군(護軍) 여선(呂宣), (여강)태수 장휴(張休,장소의 아들 장휴와는 동명이인), 회남(淮南)태수 정존(丁尊)(※구강군을 회남국으로 위나라 초에 개칭하였고 뒤에 郡이 됨), 독수합비호군(督守合肥護軍,합비를 도독하며 수비하는 호군이란 뜻으로 그 자체가 관명이기도 함) 왕휴(王休) 등과 의논하길, 각기 누대에 걸쳐 은혜를 입었는데 천년의 풍진(風塵,병란)을 만나니 구명(軀命,신명身命)을 다할 것을 생각하여 이로써 사직(社稷)을 완전하게 하고 임금을 안정시키는데 힘쓰자 하였습니다. 만약 이 뜻을 세울 수 있다면, 비록 처자를 불태우고 숯을 삼키고 몸에 옻칠을 하고(전국시대 초 지백智伯을 위해 조양자趙襄子에게 복수하려 했던 예양豫讓의 일을 말함)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사마사(司馬師)의 죄를 살펴보건대 대벽(大辟,사형)을 가해 간특함을 밝게 드러냄이 마땅합니다. (그러나)「춘추」의 뜻에서 1세(一世,일대一代)에서 선행을 하면 10세(一世)에 걸쳐 (그 선행을 감안해 다른 죄를 지어도) 용서해준다 합니다. (사마사의 부친인) 사마의(司馬懿)가 큰 공을 세워 해내(海內)에 기록될 정도였으니 옛 전의(典議)에 의거해 사마사를 (죽이지는 않고 단지 대장군 직을) 폐해 후(侯)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사마사(司馬師)의 동생 사마소(司馬昭)는 충숙관명(忠肅寬明,충성스럽고 공경히 처신하며 너그럽고 현명함)하고 낙선호사(樂善好士,선행을 즐기고 선비를 좋아함)하여 세속을 초월한 군자(君子)의 도량을 갖추고 있고 충성스런 마음으로 나라를 위했으니 사마사와 같지 않습니다. 신 등이 쇄수(碎首,머리를 부숨)할 각오로 보증하는 바이니 가히 사마사를 대신해 성궁(聖躬,임금의 몸)을 보도(輔導,도와서 올바로 이끔)할 만 합니다. (※)
※ 이안계(李安溪,청) 왈, (결국 고귀향공을 시해하게 될 사마소를 이렇게 평하니) 이 어찌 (관구검, 문흠을 두고) 남을 잘 알아보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李安溪曰 此豈爲知人者乎. / 삼국지집해)
태위 사마부(司馬孚,사마의의 동생이자 사마사의 숙부)는 충효(忠孝)롭고 소심(小心,삼가함)하니 의당 친총(親寵)하여 보부(保傅,천자의 교육,자문 등을 맡은 최고급 관직의 통칭)의 직을 주어야 합니다. 호군 산기상시(護軍散騎常侍) 사마망(司馬望,사마부의 아들)은 공사(公事)에 충실히 임하여 담당관리들이 그를 유능하다 칭하였고 멀리 승여(乘輿)를 영접하여 숙위(宿衞)한 공이 있으니 중령군(中領軍)으로 삼을만합니다. 「춘추」의 뜻에서 대의멸친(大義滅親,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죽임)이라 하였으므로 주공(周公)은 동생을 주살하고 석작(石碏)은 자식을 주륙하고 계우(季友)는 형을 짐살했으니 위로는 나라를 위한 계책이고 아래로는 종족을 보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순임금이) 곤(鯀)을 죽이고 (곤의 아들인) 우(禹)를 임용한 것을 성인(聖人)의 밝은 전범이라고 고금에서 칭합니다. (※사마사를 폐출하고 동생인 사마소 등을 임용하도록 청하는 것을 비유한 것)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 등이 상주한 바를 내려보내어 조당(朝堂)에서 널리 의논하게 하십시오. 신의 말에 따라 사마사(司馬師)가 자신의 지위를 현명한 자에게 양보하고 파병(罷兵), 거비(去備,방비함을 없앰)하여 삼황(三皇,위무제,문제,명제/삼국지집해)의 옛 법대로 한다면 천하가 협동(協同)할 것입니다. 만약 사마사가 위세에 의지하고 무릿수를 믿고서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신 등은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겸행(兼行)하여 오로지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신 등이 금일 상주하는 바는 오로지 대위(大魏,위나라)가 길이 존속하도록 하고, 폐하께서 임금의 뜻을 펼쳐 행하고 끊어지고 망하는 화(禍)를 멀리하여 백성들이 안전(安全)하고 육합(六合,우주,천하)이 일체가 되도록 하며, 충신(忠臣) 의사(義士)들로 하여금 삼황오제(三皇五帝)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은 군대가 봉기하여 천하가 요란(擾亂)해질 것을 우려하여 신이 임의로(輒) 상사(上事)하고 삼정(三征, ※)과 주(州), 군국(郡國)의 전농(典農)에게 보내 각기 관장하는 관리와 백성을 안위(安慰)하여 망동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삼가 이에 관해 갖추어서 아룁니다. 오로지 폐하께서 정신(精神)을 사랑하고 기르시고 밝은 사려로 위해(危害)를 염려하시어 해내(海內)를 안녕시키길 바랍니다. 사마사(司馬師)가 권력을 전단하고 위세를 부려 상벌을 자기 임의대로 하니 신 등이 거병했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하조하여 관문과 나룻터를 막아서 끊고 역서(驛書)가 통하지 않도록 하고 함부로 다시 징조(徵調)하여 수포(收捕,체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사마사가 (지멋대로) 지은 조서이지 폐하의 조서가 아닐 것이니 저희들은 이를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은 길이 멀어 문서가 모두 통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임의로(輒) 때에 맞추어 상벌하고 편의종사(便宜從事,형편에 따라 처리함)하고 (사마사가) 평정되는 때를 기다려 상표하겠습니다.”(須定表上???)
※ 三征(삼정) - 기본적으로는 '세 명의 사정(四征)장군'이란 뜻이나 삼국지 권21 부하전 및 배송지 주로 인용된 전략(사마표 찬)을 보면 252년에 ‘정남대장군 왕창, 정동장군 호준, 진남장군 관구검’ 세 명을 통틀어서 '三征'으로 칭하고 있어 꼭 사정장군에 국한되는 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해 호삼성은 “무구검(관구검의 다른 표기)은 (사정장군이 아니라) 바야흐로 (사진장군의 하나인) 진남장군이 되었는데 (그를 포함하여) 삼정(三征)이라 말한 것은 史에서 (엄밀하지 않게) 대략적으로 말한 것이다.”(毋丘儉方爲鎭南, 而曰三征,史槪言之)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의 관구검 표문에서 '삼정에게 격문을 보냈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회남과 형주의 오나라쪽 전선을 담당하던 사정+사진장군의 합칭으로 실제로 종종 쓰였던 말인 듯하고, 이 표문에서 말하는 두번째의 三征은 ‘정남대장군 왕창, 정동장군 호준, 진남장군 제갈탄’의 합칭으로 짐작됩니다.
대장군(大將軍)(→사마사)이 중군(中軍)과 외군(外軍)을 통수해 관구검군을 치고, 따로 (진남장군 도독예주인) 제갈탄(諸葛誕)을 시켜 예주(豫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안풍진(安風津,※)에서 수춘(壽春)으로 향하게 하고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준(胡遵)은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초(譙), 송(宋) 사이로 출병하여 그의 귀로(歸路)를 끊게 했다. 대장군은 여양(汝陽,여남군 여양현)에 주둔하며 감군(監軍) 왕기(王基)에게 전봉(前鋒,선봉)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남돈(南頓,여남군 남돈현)에서 관구검군을 기다리게 했다.
※ 안풍진(安風津) – 안풍현(安風縣)에 있던 회수 가의 나루터. 참고로, 위나라가 오나라와 대치할 때 후한 때 양주(楊州)의 구강군(九江郡)과 여강군(廬江郡) 일부를 차지하고 이 일대의 군현을 대폭 개편하는데, 후한때의 예주 여남군을 분할해 익양군(弋陽郡)을 신설하고 위나라가 확보한 여강군의 일부 현으로 안풍군(安豊郡)을 신설해 모두 예주에 소속시킵니다. (여강군의 나머지 현은 여강군으로 그대로 유지함. 오나라의 여강군도 그 남쪽에 병존했음) 또한 구강군을 회남(淮南)군(바로 관구검의 본거지)으로 고쳐 이 여강군, 회남군을 양주에 소속시킵니다. 이 안풍현(安風縣)은 후한때 군국 기준으로는 양주 여강군 안풍현이고, 위나라 이후 기준으로는 예주 안풍군(安豊郡) 안풍현(安風縣)이 됩니다.
여강군 일부 -> 안풍군 (예주)
여강군 (양주) (오나라의 여강군과 병존)
구강군 -> 회남군 (양주)
이제 제군(諸軍)들이 모두 견벽(堅壁)한 채 더불어 싸우지 않아 (※) 관구검, 문흠은 진격하여 싸울 수 없고 퇴각하자니 수춘이 습격받을까 두려워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계책이 궁해져 어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회남(淮南)의 장사(將士,장졸)들은 집이 모두 북쪽(→중국 내지)에 있어 중심(衆心,뭇 사람들의 마음)이 저산(沮散,꺾이고 흩어짐,궤산)하여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지니 오직 회남(淮南)에서 새로 귀부한 농민(農民)만이 그를 위해 부려질 뿐이었다.
※ 堅壁勿與戰 (견벽물여전) / 삼국지집해 (아래 원문과 해석문 중의 []는 삼국지집해의 진서 인용문 중에서 생략된 글을 추가한 것)
: 이는 정무(鄭袤, 정태鄭泰의 아들임)의 계책이다.「진서」(권44) 정무전에 의하면, [관구검이 작란하여 사마사가 이를 치러 출병할 때 어떤 계책을 우선적으로 써야 할지 묻자] 정무가 답하길, “[예전에 관구검과 함께 대랑(상서랑)을 지내 그에 대해서 특히 잘 아는데] 관구검은 모책을 좋아하나 사정(事情,사리)에 통달하지 못하고 [전에 유주幽州에서 훈공을 세운 이래 그가 바라는 바가 무한하며] 문흠은 용맹하나 꾀가 없습니다.(無算) 이제 대군(大軍)이 출기불의(出其不意)하여, 강회(江淮)의 병졸들(→관구검군)이 날카로우나 굳지는 못하니 해자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여 그들의 기세를 꺾는 것이 아부(亞夫,주아부)가 쓴 것과 같은 장책입니다.” 하였다.(※한나라 때 주아부가 견벽堅壁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吳, 초楚를 격파하였다 / 호삼성 주) <<此鄭袤之策也 晉書鄭袤傳 袤曰 [昔與儉俱爲臺郎 特所知悉] 毌丘儉好謀而不達事情 [自昔建勳幽州 志望無限] 文欽勇而無算今大軍出其不意 江淮之卒銳而不能固 深溝高壘以挫其氣, 此亞夫之長也.>>
대장군이 연주자사(兗州刺史) 등애(鄧艾)를 보내 태산(泰山)의 제군(諸軍) 만여 명을 지휘해 낙가(樂嘉)에 이르러 약세를 보여 그를 유인하고는 대장군이 곧이어 수(洙,※)로부터 도착했다. 문흠이 이를 알지 못하고 과연 밤중에 와서 등애 등을 습격하였는데 때마침 날이 밝아 대군(大軍)의 병마(兵馬)가 많은 것을 보고는 이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1]
※ 洙(수) / 삼국지집해
: 조일청(趙一淸,청) 왈, 洙(수)는 許(허)의 오기로 의심된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건대, 洙(수)는 汝(여)로 적어야 맞다. 윗 문장에서 ‘대장군이 여양(汝陽)에 주둔했다’ 했으니 바로 이것이다.「진서」경제기(사마사)에서는 ‘경제가 여양에 주둔하고 잠군(潛軍)으로 함매(銜枚,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군사들에게 하무를 물림)하여 곧바로 낙가(樂嘉)로 나아갔다’ 하였다.” (趙一淸曰 洙疑許之誤 弼按洙當作汝 上文大將軍屯汝陽是也 晉書景帝紀 帝屯汝陽潛軍銜枚, 徑造樂嘉.) /「삼국지사전」에서는「수경주」에 의거해서 강이름으로서 사수(泗水)의 지류로 설명해놓았는데 지리관계를 볼 때 좀 이상하고, 汝의 오기로 본「삼국지집해」의 설명이 더 맞는거 같습니다.
[1]「위씨춘추魏氏春秋」(동진, 손성孫盛) 왈, 문흠(文欽)의 중자(中子,맏이나 막내가 아닌 가운데 아들)인 문숙(文俶)은 어릴 때 이름이 앙(鴦)(→문앙文鴦)으로,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문흠에게 말했다, “(적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때이니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2대(隊)로 나누어 밤중에 군(軍)을 협공(夾攻,양 갈래로 공격함)했다. 문숙이 장사(壯士)들을 이끌고 먼저 도착해 대장군(→사마사)을 큰 소리로 부르니 군중(軍中)이 놀라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문흠이 기약한 시간에 늦어 접응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문숙이 물러났고 문흠 또한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위말전魏末傳」왈, 전중인(殿中人)으로 성(姓)이 윤(尹), 자(字)가 대목(大目)인 자(→윤대목)는 어려서 조씨(曹氏)의 가노(家奴)가 되어 늘 황제 곁에서 시중들었었는데 (※) 대장군이 (관구검을 치러 나설때)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윤대목(尹大目)은 (문흠군의 습격에 놀라) 대장군의 눈알 하나가 이미 튀어나온 것을 알고는 (대장군에게) 여쭈었다,
“문흠은 본래 명공(明公)의 복심(腹心,심복)이었으나 다만 다른 이에 의해 그르쳐졌을 뿐이며 또한 천자와 같은 향리인입니다. 저 윤대목이 예전에 문흠의 신뢰를 받았으니 (제가) 그를 뒤쫓아가 공과 다시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설득하게 해 주십시오.”
대장군이 이를 들어주어 윤대목을 보내 홀몸으로 가게 하니, 큰 말을 타고 개갑(鎧甲,갑옷)을 입고는 문흠을 뒤쫓아가 멀리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윤대목은 내심 실제로는 (사마사를 위하는게 아니라) 조씨(曹氏)의 안녕을 바랐으므로 (※) 그릇되이(에둘러서) 말하길,
“군후(君侯)는 어찌 며칠을 더 참지 못하시오!”
라 하며 (※) 문흠이 그 뜻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흠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는 이내 큰 목소리로 윤대목을 욕하며 말했다,
“너는 선제(先帝,예전 황제)의 가인(家人)으로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사마사(司馬師)와 함께 반역하였다. 상천(上天,하늘)을 돌아보지 않으니 하늘이 너를 돕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활을 당기고 화살을 채워 윤대목을 쏘려 하자 윤대목이 울면서 말했다,
“세사(世事,세상사;대세)가 어그러졌소. 스스로 잘 노력해보시오.”
※ 전중인(殿中人) 윤대목(尹大目) / 삼국지집해
: 호삼성(胡三省, 원元) 왈, (윤)대목이 당시에 전중교위(殿中校尉)였다. 조일청(趙一淸) 왈, 이 사람이 즉 사마의가 시켜 조상(曹爽)을 유인하도록 한 그 자이다. (胡三省曰 大目時爲殿中校尉. 趙一淸曰 此人卽司馬懿令其誘曹爽者.) / 조상전 주「위진세어」나「진서」선제기에 의하면, 고평릉 사건 때(249년 정월, 조상曹爽이 황제와 함께 고평릉에 참배하러 간 틈을 타 사마의가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장악하였고 결국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음) 전중교위 윤대목을 세객으로 보내 ‘(죽이지는 않고) 관직에서 파면하기만 하겠다’고 맹세하며 조상에게 투항하도록 설득하자 조상이 그 말을 믿고 투항하지만 끝내 모반죄를 걸어서 다 죽여버립니다. 이때 문흠에게 윤대목은 ‘사마씨에게 붙어 주인을 배신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지금은 자신에게마저 해를 끼치려는 배은망덕한 자’ 정도로 보였겠죠.
※ 大目心實欲曹氏安 (대목심실욕조씨안) / 삼국지집해
: 호삼성 왈, 윤대목이 조상을 (투항하도록) 설득할 때는 아직 사마씨를 의심하지 못했다가 그가 문흠을 뒤쫓아 대화를 나눌때에 이르러 깨달았을 뿐이다. (胡三省曰 尹大目說爽 猶未疑司馬氏也 至其追語文欽乃覺耳.) / 고평릉 사건 때 윤대목을 시켜 조상을 설득하게 하는 대목(자치통감 권75)의 호삼성 주인데, 호삼성은 윤대목이 조상을 설득할 때 이미 조상을 배신하고 사마씨의 사람이 된 건 아니고 윤대목 또한 사마의에게 속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 君侯何苦若不可復忍數日中也 (군후하고약불가부인수일중야) /「자치통감」호삼성 주
: 문흠이 어찌 며칠을 더 참고 견디며 사마사와 서로 맞서지 않느냐는 뜻으로, 사마사의 병이 이미 위독하니 필시 변고가 있으리라는 말이다. (蓋謂文欽何不堅忍數日, 與師相持, 師病已篤, 必當有變也.)
대장군이 효기(驍騎,용맹한 기병)를 풀어 추격하여 그를 대파하였고 문흠은 달아났다. 이 날 관구검은 문흠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밤중에 달아나고 무리가 붕괴하였다. 신현(愼縣,여남군 신현)에 도착했을 때 좌우의 사람과 병사들이 점차 관구검을 버리고 떠났고 관구검은 홀로 동생인 관구수(毌丘秀), 손자 관구중(毌丘重)과 함께 물가의 풀숲에 숨었다.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일반백성(民)인 장속(張屬)이 나아가 활을 쏘아 관구검을 죽이고 그 목을 경도(京都)로 보냈다. 장속은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관구수, 관구중은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갔다. 장사(將士)들 중 관구검, 문흠에게 박협(迫脅,협박)되었던(위협받아 뒤따랐던) 자들은 모두 귀항(歸降,투항)했다. [2]
[2] 문흠(文欽)이 곽회(郭淮)에게 보낸 서신 –
“대장군 소백(昭伯,조상曹爽의 자字)이 태부(太傅)(→사마의司馬懿)와 함께 (명제의) 고명(顧命)을 받아 (명제께서 그를) 상(牀)에 오르게 하여 (친근히) 팔을 잡으며 천하의 일을 맡겼으니 이는 멀고 가까운 이들이 모두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다 뒤에 (사마의가 조상을 죽여) 그의 제사를 끊기게 하고 그의 친당(親黨)들에게까지 (화가) 미쳤으니,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준걸들이라 가히 애통한 일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공후(公侯,상대방인 곽회에 대한 경칭)께서는 특히 대사마공(大司馬公)(→조상曹爽의 부친인 대사마 조진曹眞)과 더불어 은친(恩親)을 나누어 의(義)가 금석을 꿰뚫듯 했으니 (조상과 그 친당들이 주살되던) 당시에 더욱 괴롭고 가슴아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으리라 생각합니다. (251년) 왕태위(王太尉)(→태위 왕릉王淩)는 그(→사마의)가 조정을 전단하는 것을 미워하여 은밀히 거병하고자 했으나 그 일이 끝내 성공하지 못해 또한 주멸되었고 그 해가 초왕(楚王,조조의 아들인 조표曹彪. 왕릉이 그를 옹립하려다 실패하고 죽음)에까지 미쳤으니 이를 매우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태부(太傅)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인 사마사(司馬師)가 부친의 업(業)을 이어받아서는 방자하게 포학한 짓을 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임금을 내쫓고 황후를 시해하며 충량한 이들을 잔륙(殘戮)하고 화심(禍心,재앙을 일으키려는 마음,못된 마음)을 품어 마침내 (제위를) 찬탈하고 (임금을) 시해하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방관하며) 참을만한 일이라면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저 문흠은 명의(名義), 대고(大故)로써 임금을 섬김에 절의가 있어 충분(忠憤,충의로 인한 분한 마음)이 안으로부터 솟아 잠자고 먹는 것을 잊고 아끼고 돌아보는 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때마침 관구자방(毌丘子邦,관구검의 아들인 관구전毌丘甸의 字가 子邦)이 스스로 부친(→관구검)의 서신을 (제게) 주었는데 그곳에서 전하길, 공후(公侯)께서 임금을 섬기는 의(義)를 다하여 백발(白髮)로 (※) 떨쳐 일어나 태공(太公,태공망 여상)을 본받고 동쪽에서 (거병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를 기다려 영향(影響), 상응(相應)하려 하니 서로 소식을 주고 받는 날에 이르러 어찌 강개(慷慨)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처자식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고 관구진동(毌丘鎭東,진동장군 관구검)과 함께 의병(義兵) 3만여 명을 일으켜 서쪽으로 경사(京師,수도)로 향하여 왕실을 부축하고 간신역도들을 쓸어없애고자 하였는데, 발꿈치를 들고 (간절히) 서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대의) 소식을 듣지 못하니 노(魯)나라가 고자(高子)를 바랐던 일이라도 이보다는 더 급박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인(仁)에 관해서는 사양해선 안되는 법인데(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임금의 어려움을 구하는 일이겠습니까. 길이 멀고 어려움을 헤아린 까닭에 끝내 기요(期要,기한을 약정함)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건너는 처지라 안위(安危)의 세(勢)가 같은데 재앙와 고통이 이미 잇달아서 말을 꾸며서 풀릴 일이 아니니 공후(公侯)께서 분명히 밝히십시오. (???)
※ 欲奮白髮(욕분백발) / 삼국지집해
: 곽회는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니 정원(正元) 연간인 이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7-80살이 되었을 것이다. (郭淮於建安中擧孝廉 至正元時當已七八十矣.)
(우리가) 함께 조씨(曹氏)를 섬기고 위나라 조정에 신의를 쌓아온 것은 길 다니는 (보통) 사람들도 모두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조정 선비들은 이익을 탐하고 구차하게 살아남고자 하니 이는 열사(烈士)가 수치스러워하고 공후(公侯)께서도 업신여길 일입니다. 고수(賈豎,상인의 멸칭.장사꾼)라도 차마 못할 일인데 하물며 (우리같은) 당도(當塗)의 선비(권세를 잡거나 요직을 맡은 선비)겠습니까! 군(軍)이 항(項)에 주둔하고 소인(小人)은(저는) 윤월(윤 정월) 16일에 따로 진병하여 낙가성(樂嘉城)에 이르러 사마사를 치니 사마사의 무리들이 곧이어 붕궤(崩潰)하여 그들이 베이고 끊어졌고 다시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다만 장구(長驅,멀리 달려감)해 곧바로 경사(京師,수도 즉 낙양)로 향하려 했으나, 유언(流言,근거없는 소문)이 먼저 이르러 관구(毌丘)(→관구검)가 이를 다시 상세히 헤아리지 않고 또한 소인(小人)이(제가) 그르친 것으로 여기니 이리하여 제군(諸軍)이 곧 와해되었습니다. 관구(毌丘)가 되돌아 달아나니 (제가) 뒤쫓아가 오해를 풀려했으나 미치지 못했습니다. 소인(小人)은 항(項)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왕기(王基) 등의 12군(軍)을 만나 관구(毌丘)를 뒤쫓다가 진병하여 이를 쳐서 즉시 격파하였고 향하는 곳마다 전승(全勝,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군대가 없으니(無繼) 어쩌겠습니까? 외로운 군사가 양창(梁昌,수춘 북쪽으로 추정/삼국지집해)에 이르러 진퇴(進退)할 바를 잃어 수춘(壽春)으로 돌아가 의거하려 했으나 수춘이 또한 함락되어 낭패(狼狽)스럽고 지애(躓閡,쓰러 넘어지고 방해받음)하고 다른 계책도 없었으니 오직 대오(大吳,오나라)에 귀명(歸命,귀순)하여 군대를 빌리고 군량을 청해 오운(伍員,춘추시대 때 오자서)을 본받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차라리) 복예(僕隸,종복)가 되는 편이 나으니 어찌 쾌심(快心)으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길이 조씨(曹氏)에게 적게라도 혈식(血食,제사용 제물)을 받을 수 있게 하느니만 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대국(大國)이 돕고 염려해주는 바입니다. 공후께 바라건대, 정영(程嬰), 저구(杵臼)가 전대(前代)에 이름을 날리나 (※) 유독 대위(大魏,위나라)에만 응양(鷹揚,하늘을 나는 매처럼 위엄있고 용맹함)의 선비가 없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 정영, 저구 / 삼국지집해
: 「사기」조세가(趙世家)에 의하면 도안고(屠岸賈)가 조씨(趙氏)를 멸하자 조삭(趙朔)의 객(客)인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조삭의 벗인 정영(程嬰)이 모의하여 조씨(趙氏)의 고아를 숨겼고 뒤에 끝내 도안고를 멸했다. (史記 趙世家 屠岸賈滅趙氏 趙朔客公孫杵臼 朔友人程嬰 謀匿趙氏孤兒後卒滅屠岸賈.)
지금 대오(大吳,오나라)가 대의(大義)를 두텁게 숭상하니 (위나라의 변고에 대해) 심히 민도(愍悼,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라에 대해 대분(大分)으로 연접(連接)되고 멀리 하나의 세(勢)를 함께 하니 날마다 함께 거사하여 중국을 과분(瓜分,박을 쪼개듯 분할함)하고자 하는 것이지 편취(偏取)하여 스스로 소유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공후께서 필시 (저와) 함께 모질게 마음먹고는 흉회(胸懷)를 통수하여(忍帥胸懷)(?) (※) 마땅히 세(勢)를 광대하게 하고자 하나 진천(秦川)의 병졸만 외로이 거사할 수 없다고 우려하실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의당 굴기신인(屈己伸人,자신을 굽히고 남을 펴게 함)하여 목숨을 맡겨 한나라(→촉한)에 귀부해야 하니 동쪽과 서쪽이 함께 이와 같이 거사하면 가히 사마사 일당을 극정(克定,이기고 평정함)할 수 있습니다. 제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시고 만약 제 계책이 따를만 하면 의당 한나라 군사로 하여금 (거사할) 기요(期要,기한)를 정하게 할 것이니 육합(六合, 천,지,사방.온 천하)이 교고(校考,조사? 교정?)되어 (우리는) 주공, 소공과 같이 봉해지고 (조씨의?) 아손(兒孫,자손)에게 맡겨야 합니다. 이는 또한 작은 일이 아니나 대장부(大丈夫)가 어찌 낙낙(落落,외로운 모양을 형용)함에 처했다 하여 이로써 충심(忠心)을 드러내는 일을 멀리하겠습니까. 때를 잘 맞춰(너무 늦지않게) 반가운 답변이 있기를 바랍니다.”
※ 忍帥胸懷 (인수흉회) / 삼국지집해
: 송본(宋本)에는 師(사)가 帥(수)로 적혀있다. (※삼국지집해본에는 忍師胸懷로 적었으므로 이런 주석을 달았음) 이 곳에는 오자나 탈자가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宋本師作帥 此處疑有脫誤.) / 帥, 師 어느쪽이든 해석이 매끄럽게 잘 되지가 않습니다. 오탈자 고려없이 주어진 문장대로만 본다면 帥쪽이 좀더 자연스럽고, 흉회(胸懷)는 보통 흉금과 같은 말로 쓰이는데 이 문맥에서는 ‘곽회가 거느리던 직속군사’ 정도의 뜻으로 쓰인 걸로 보면 대충 뜻은 통하는거 같습니다.
이때는 곽회가 이미 죽은 뒤였으나 문흠은 이를 알지 못했으므로 이 서신을 보낸 것이다.
/ 「세어世語」왈, 관구검이 주살당하고 (그의) 당여(黨與,일당) 7백여 명이 시어사(侍御史) 두우(杜友)에게 넘겨져 치옥(治獄,옥사를 다스림)되니 오직 수사(首事,주동함,먼저 봉기함)한 자 10명만 보고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도록 상주했다. 두우(杜友)는 자(字)가 계자(季子)이고 동군(東郡) 사람이며, 진나라에서 벼슬하여 기주자사, 하남윤을 지냈다. 아들인 두묵(杜默)은 자(字)가 세현(世玄)으로 이부랑(吏部郎), 위위(衞尉)를 역임했다.
※ 이 무렵 사건순서 정리
:「삼국지」위서 삼소제기,「진서」경제기,「자치통감」의 기술들이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①「삼국지」위서 삼소제기(고귀향공)
- 정원2년(255년) 1월 12일(乙丑), 진동장군 관구검, 양주자사 문흠 반란. 25일(戊寅), 대장군 사마경왕(사마사)이 이를 공격. 30일(癸未), 거기장군 곽회 죽음.
- 윤1월 16일(己亥), 낙가(樂嘉)에서 문흠 격파. 문흠은 도주하였다가 오나라로 달아남. 21일(甲辰), 안풍진 도위가 관구검을 베고 그 수급을 경도로 보냄. 29일(壬子), 관구검, 문흠에 연루된 다른 이들을 사면하고 진남장군 제갈탄(諸葛誕)을 진동대장군으로 삼음.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죽음.
- 2월 5일(丁巳), 위장군 사마문왕(사마소)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
②「진서」경제기 & 중화서국본 교감기
: 특히 날짜기록이 ①과 꽤 다른데, 오류로 생각되는 대목은 괄호 안에 적었습니다.
- 1월, 관구검, 문흠이 난을 일으켜 격문을 돌림
- 2월, 관구검군이 6만 군사를 이끌고 회수를 건너 서진하자(1월 기사가 그대로 이어지는 건데 2월이라고 잘못 덧붙인 것으로 보임. 아래 교감기1 참고) 사마사가 조신들과 정토계획을 의논하고는 戊午일, 중군(中軍)의 보기 10여 만으로 공격. (2월 무오일은 6일, 1월 무오일은 5일이나 둘다 아니고, 위 삼국지 해당대목으로 볼 때 (1월) 戊寅의 오기로 보임. 교감기 2 참고) 甲申일에 은교(濦橋)에 주둔. (2월에 갑신일 없음. 윤1월 초하루가 갑신일이므로 여기서부터 윤1월의 기사로 보임. 교감기3 참고) 이후 낙가전투와 문흠 패주, 관구검 죽음
- 윤월 辛亥일(이해 윤월은 윤1월이고 윤1월 신해일은 28일. 위 삼국지 해당대목과 비교하면 하루 차이), 허창에서 사마사가 죽으니 이때 나이 48세.
「진서」중화서국 점교본 교감기 1 / 二月儉欽帥六萬渡淮而西 - 위지 고귀향공기(①을 말함)에 의하면 문흠, 관구검이 거병한 것은 정원2년 정월 12일 을축일의 일이고 위지 관구검전 주에서 인용한 문흠이 곽회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소인이(제가) 윤월 16일에 따로 진병하여 낙가성(樂嘉城)에 이르러 사마사를 쳤습니다.” 하였다. 고귀향공기에서는 윤월 기해일에 낙가에서 문흠을 격파하고 갑진일에 관구검을 참수했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 해는 윤 정월이며(1월-윤 1월-2월의 순서) 기해일은 윤 정월 16일이고 갑진일은 (윤 정월) 21일이니, 관구검, 문흠이 거병하여 패하게 된 것은 2월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일을 2월의 일로 적은 것은 오류로 보인다. (二月儉欽帥六萬渡淮而西 魏志高貴鄉公紀稱,儉、欽起兵在二年正月十二日乙丑,魏志毌丘儉傳注引欽與郭淮書云:「小人以閏月十六日別進兵,就於樂嘉城 討師.」高貴鄉公紀謂閏月己亥破欽於樂嘉,甲辰斬儉首.按:是年閏正月,己亥為閏正月十六日,甲辰為二十一日,儉、欽起兵及事敗皆在二月以前.此繫於二 月,恐誤)
교감기 2 / 戊午帝統中軍步騎十餘萬以征之 – 살펴보건대, 戊午일은 2월 6일이고 이때는 문흠, 관구검이 이미 패한 뒤다. 심가본(沈家本)의 삼국지쇄언(三國志瑣言)에서는 戊午는 戊寅의 오류라 했다. 문흠, 관구검이 정월 12일에 거병하고 사마사가 정월 25일에 출정하였으니 그 설이 응당 옳다. 이를 2월의 일로 적은 것은 잘못이고 날짜의 간지 또한 잘못되었다.[2월 戊午(X), 1월 戊寅(O)] (戊午帝統中軍步騎十餘萬以征之 按:「戊午」為二月初六,時欽、儉巳敗.沈家本三國志瑣言謂「戊午」為「戊寅」之誤.欽、儉以正月十二日起兵,司馬師以 正月二十五日戊寅出征,其說當是.此繫於「二月」下非,日干亦誤.)
교감기 3 / 甲申次于濦橋 - 甲申일은 윤 정월 초하루다. 은교에 주둔한 것은 사마사가 죽은 것과 더불어 모두 윤월 간에 있었던 일이다. 아래 글의 閏月 두 글자가 응당 甲申 앞에 있어야 하며 (閏月 甲申이 맞고 이 뒤로는 윤1월의 기사라는 말) 통감 권76에서 증험된다. (甲申次于濦橋 甲申為閏正月初一.次於濦橋與司馬師之死,皆閏月間事.下文「閏月」二字當冠在「甲申」上,通鑑七六可證.)
③ 한편,「자치통감」에서는 이들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는데,「진서」쪽의 오류를 답습한 대목이 있습니다.
- 정원 2년 1월, 관구검, 문흠 거병해 5-6만 군사로 회수 건너 항현에 주둔. 조정에서 논의 끝에 戊午일에 사마사가 중외의 제군을 이끌고 정토. (앞서 본 바와 같이「삼국지」의 ‘1월 戊寅’,「진서」의 ‘2월 戊午’ 의 차이를 ‘1월 戊午’로 정리한 셈인데, 戊午는 1월로 치면 5일이라 사건전개상 무리가 있고 교감기2에서처럼「삼국지」의 ‘1월 戊寅’으로 보는게 맞다 생각됩니다).
- 윤월(윤1월) 甲申일(1일) 사마사가 은교 주둔. 癸未일, 정서장군 곽회 죽음 (윤1월에 계미일 없음. 어떤 기사를 근거로 이렇게 정리했는지 모르겠으나 위「삼국지」에서처럼 1월 계미일 즉, 1월 30일로 보는게 맞겠죠. 그리고 곽회전,삼소제기에 의하면 이때 곽회는 기존 정서장군에서 거기장군으로 영전한 상태임) 이어서 낙가전투와 문흠 패주. 壬寅일(19일), 오나라 손준(孫峻)이 탁고(橐皋)에 도착하자 문흠 부자가 군영으로 와서 투항함. 甲辰일(21일), 안풍진의 백성 장속이 관구검을 참수해 목을 경도로 보냄. 그리고 제갈탄이 수춘성으로 진군해 평정함. 辛亥일(28일), 사마사가 허창에서 죽음. (「삼국지」의 壬子와「진서」의 辛亥 중「진서」에 따른 것)
- 2월 丁巳일(5일), 사마소를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
「삼국지」고귀향공기를 기본축으로 해서,「진서」,「자치통감」등 기사들을 함께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정원2년(255년) 1월 12일(乙丑), 관구검, 문흠의 반란 → 25일(戊寅), 정토하기 위해 사마사 출병. [30일(癸未), 곽회 죽음] → 윤1월 1일(甲申), 사마사가 은교에 주둔 (진서, 자치통감) → 16일(己亥), 낙가전투와 문흠 패주 → 한편, 9일(壬辰) 오나라 손준이 수춘으로 출병하였다가 문흠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19일(壬寅), 탁고(橐皋)로 진군하자 문흠이 군영으로 와서 투항. (삼국지 오서 삼사주전) → 21일(甲辰), 안풍진 도위부의 백성 장속이 관구검을 베고 그 목을 경도로 보냄. → 29일(壬子), 사마사가 허창에서 죽음 (진서에서는 辛亥=28일.)
관구검의 아들인 관구전(毌丘甸)은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였는데 앞서서 관구검이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 꾸미는 것을 알고 몰래 가속(家屬)들을 빼내어 거느리고는 신안(新安,홍농군 신안현)의 영산(靈山) 위로 달아났다. 이를 따로 공격하여 격파하고 관구검의 삼족을 멸했다. [1]
[1] 「세어世語」왈, 관구전(毌丘甸)은 자(字)가 자방(子邦)이고 경읍(京邑,경도)에서 명성이 있었다. 제왕(齊王,조방)이 폐위되자 관구전이 관구검에게 말했다,
“대인(大人)께서 방옥(方獄)의 중임(※진동장군으로 한 방면을 맡아 도독하는 임무를 비유)을 맡고 있으니, 나라가 기울이지고 무너지는데 안연(晏然,편안)히 스스로 지키고만 있으면 장차 사해(四海,천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관구검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대장군(→사마사)이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였는데(꺼렸는데) 관구검이 거병하게 되자 굴염(屈[冉+頁]=屈髥)(※)의 소재를 물어보고는 (관구전이 관구검과 함께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말하길, (관구검이) 오지 못할 것이고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거라고 하였다. 관구검이 처음 거병하여 아들인 관구종(毌丘宗) 등 4명을 오나라로 들여보냈다. 태강(太康: 晉무제 280-289) 중 오나라가 평정되자 관구종의 형제가 모두 중국(中國)(→진나라)으로 되돌아왔다. 관구종(毌丘宗)은 자(字)가 자인(子仁)으로 검소한 기풍이 있었고 (관직이) 영릉태수에까지 이르렀다. 관구종의 아들 관구오(毌丘奧)는 파동감군(巴東監軍), 익주자사를 지냈다.
/ 습착치(習鑿齒)가 말했다, “관구검은 (위나라) 명제(明帝)의 고명(顧命)에 감읍한 까닭에 이 싸움을 치르게 되었다. 군자라면 관구검의 일이 비록 이루어지진 못했으나 가히 그를 충신(忠臣)이라 이를 수 있으리라. 무릇 절의를 다하고 의로운 일에 나서는 것은 나(我)에게 달려있고 그 일을 이루거나 실패하는 것은 시세(時)에 달려 있는 법이다. 나에게 만약 시세(時)가 맞지 않다면 어찌 반드시 그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내가 반드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잊는(개의치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옛 사람이 이르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그에게) 산 자가 부끄럽지 않다(不愧)’ 하였는데, 관구검과 같다면 가히 ‘부끄럽지 않다(不愧)’ 이를만 하구나.
※ 屈[冉+頁](굴염) - 뒷 글자는 髥(구레나룻 염)의 이체자인데 워드로 표기가 안돼서 파자해서 적었습니다.(冉+頁) 중화서국본에서 고유명사로 표기되어 있고 문맥상 관구전을 가리키는데, ‘굽은 구레나룻’이란 뜻으로 볼 때 신체특징을 딴 별명이나 그를 비하해서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문흠(文欽)이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가니 오나라에서 문흠을 도호(都護), 가절(假節), 진북대장군, 유주목(幽州牧), 초후(譙侯)로 삼았다. [1]
[1] 문흠(文欽)이 오나라에 항복하며 표(表)를 올려 말했다, “품명(稟命)이 불행하여 늘 위국(魏國)에 예속하여 하늘에 의해 양쪽으로 끊어졌습니다. 비록 구석의 도시에 엎드리더라도 스스로 어찌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마사(司馬師)가 도천작역(滔天作逆)하여 두 임금을 폐위하여 해쳤으니(廢害二主) (※) 신(辛,상나라 주왕), 계(癸,하나라 걸왕), 고(高,???), 망(莽,왕망) 같은 악인이라도 족히 비유될 바가 아닙니다. 저 문흠이 누대에 걸쳐 위나라의 은혜를 받아 오조지정(烏鳥之情,까마귀가 반포反哺하며 어미새의 길러준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내심 분용(憤踊,분격)하는 마음을 품고 재삼지의(在三之義,군君,사師,부父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로 죽기를 바랐습니다. 전에 관구검(毌丘儉), 곽회(郭淮)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함께 사마사(司馬師)를 쳐서 흉얼(凶孽,반역자)을 쓸어없애고자 하여 실로 신이 루루(慺慺,정성스러운 모양)하게 맡은 바를 관장했으나 지려(智慮,지모와 사려)가 천박(淺薄)하여 미미한 절의나마 펼치지 못하니 나아가 의지할 바가 없어 비통함이 가슴을 끊는듯 하였습니다. 물러나 생각해보건대 본조(本朝)(→위나라)를 부익(扶翼,부축하고 도움)할 수 없고 부끄러움을 품은 채 면앙(俛仰,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봄)하니 스스로 몸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옛 의(義)를 빌미로 삼아 실로 귀의할 곳이 있어 천위(天威)를 빌려 만에 하나 뜻을 펼칠 수 있다면 죽는 날에 이르러 또한 한스러울 바가 없을 것입니다. 곧바로 서로 이끌고 거느리며 성화(聖化)에 귀명(歸命,귀순)하나 구차한 삶을 부끄럽게 탐하는 것은 (제가) 진술하는 바가 아닙니다 (???) 삼가 위나라로부터 받은 사지절(使持節), 전장군(前將軍), 산상후(山桑侯)의 인수(印綬)를 바쳐 올립니다. 표(表)를 올리며 황혹(惶惑,두렵고 당혹함)하고 엎드려 죄주(罪誅,치죄)되기를 기다립니다.”
※ 廢害二主(폐해이주) / 삼국지집해
: 하작(何焯,청) 왈, 이 표(表)는 후대인의 위작(僞作)이다. (이때 문흠이) 고귀향공(高貴鄕公)이 사마소에게 시해당한 일을 어찌 알아서 ‘두 임금(二主)’(을 폐위하고 해쳤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何焯曰 此表後人僞作高貴鄕公之弑昭事也 何得預言二主乎) / 폐위하여 해친 二主는 제왕 조방과 고귀향공 조모를 말하는 것일텐데, 고귀향공 조모는 이때 당시의 황제이고 5년 뒤인 260년에 사마소에 의해 시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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